헌병대가 왔다!
난 유격장 조교를 시작하지 못했다. 뜻하지 않게 미군 용산기지로 가서 WAR GAME을 하고 왔다. 아니 맛도 보지 못하고 견학을 다녀왔다는 표현이 정확한 거 같다. 다른 부대 아저씨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왔다. 고생했다는 이유로 대대장에게 휴가증까지 얻었다. 다시 부대 밖으로 휴가를 나간다는 게 귀찮을 정도로 WAR GAME은 편안한 휴식을 주었다.
유격장으로 복귀했다. 기대와 달리 소대분위기는 처참했다. JYP 닮은 내 동기 형철이는 영창에 갔다. 후임들에게 지시보다 "다 같이 하자."로 권유하는 말로 바뀌었다. 형철이는 5일을 영창에서 보내다 복귀했다. 잘못은 했지만, 같이하지 못한 죄책감이 들었다. 지시한 병장 놈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
그래도 우리는 유격장 조교로써 임무를 다해야 했다. 내가 파견가 있는 동안 부사수는 기초 18단계 코스에서 달인이 돼 있었다. 난 사수로써 입으로 올빼미(유격훈련을 받으러 온 부대의 병사)들을 굴리기만 하면 됐다.
빨간색 각진 조교 모자를 눈을 반쯤 가린 채 올빼미들을 쳐다본다. 그들은 내 입에서 어떤 명령이 떨어질지 두려운 표정으로 본다. 기본적인 PT체조부터 선착순, 군가 등으로 혼을 빼놓을 수 있다. 더욱이 우리 교장은 물 웅덩이가 있어서, 특화된 물놀이? 까지 시킬 수 있었다.
사단 내 여러 부대가 다녀갔다. 반가운 훈련소 동기를 보면 열외를 시켜주었다. 나와 같이 군대에 들어온 사회 친구에게는 '짜파게티'까지 전달해 주었다. 유격장 내에서 '조교'는 커 보이는 존재였다.
매번 다른 부대가 들어오지만, 같은 패턴을 지속하면서 슬슬 지루해졌다. 처음에는 눈물도 피도 없을 정도로 올빼미들을 다뤘다. 시간이 지나면서 말보다 그네 넘기를 체험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한 번에 통과하는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물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더운 강원도 날씨에 물이 반가운지 그들은 허우적거리면서도 즐거워했다. 단, 그 물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말하지 않겠다.
소대장이 다음 부대를 알려왔다.
"이번 부대는 헌병대대다."
소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상하게 수색대대와 헌병대는 물과 기름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역사와 전통이 이어졌는지 모른다. 외박 나가서 헌병대의 하이바를 빼앗아 휴가증을 얻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 홍천 어느 술집에서 헌병대와 싸워서 이긴 소문 등 정체 모를 이야기들이 떠돌아다녔다.
헌병대는 입장부터 다른 부대와 달랐다. 그들 특유의 발걸음과 묵직함이 느껴졌다. 헌병대 부대장은 지난날의 전통을 알고 있듯이 우리에게 코스 실습위주로 해 주기를 바랐다.
헌병대 훈련이 시작됐다. 헌병대답게 키도 크고 몸도 좋았다. 하지만, 이곳은 어디인가. 유격장이다. 특별한 강원도 홍천의 더운 날씨에 그들도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헌병대를 기다렸다는 듯이 조교들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나와 부사수는 우리 코스에서 어떻게 하면 힘들게 할지 궁리했다. 잠시 후 올빼미가 아닌 선임들이 우리 코스로 몰려왔다.
"코 병장, 헌병대 간부들이 간섭해서 하나도 굴리지 못했다. 네가 어떻게 좀 해줄 수 없냐?"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코스의 자랑, 물 웅덩이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네 넘기를 질리도록 시켜주면 됐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물 웅덩이에 빠질 것이고, 준비한 더러운? 물을 삼킬 것이다.
헌병대가 우리 코스에 도착했다. 다른 부대와 다르게 장교들이 많이 동행했다. 난 전혀 올빼미들을 굴릴 생각이 없다고 생각할 만큼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게 설명했다. 부사수의 시범도 보이지 않고, 바로 코스 체험에 들어갔다. 흡족해하는 간부들의 표정이 보였다. 나도 같이 미소를 보여줬다.
빠르게 끊기지 않도록 코스 체험은 실시됐다. 헌병 올빼미들은 처음에는 웃었지만, 점점 표정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기분이 든 것이다. 다른 코스의 조교들까지 우리에게 왔다. 함께 열심히 올빼미들을 그네 넘기로 굴려주었다.
말년 휴가를 나왔다.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홍천 터미널로 가야 한다. 말년 특유의 복장과 걸음걸이로 터미널을 걷고 있었다. 이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사병!"
헌병대였다. 나를 지목해서 터미널 내에 있는 현병 사무실로 데려갔다. 내 복장과 두발상태를 지적했다.
난 체념한 듯 앉아있었다. 헌병대원은 수색대대에 전화를 걸어 사실을 보고했다. 하지만 부대에서 돌아온 말은 말년휴가 나온 것이니 그냥 보내주라는 답변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가려고 할 때 헌병대가 나를 불렀다.
"사병, 혹시 유격장 조교 하지 않았습니까?"
"했습니다. 왜요?"
"훈련 끝나면 터미널에서 가장 잡고 싶은 조교였습니다. 다음에는 보지 맙시다."
이래서 사람은 적을 만들면 안 된다. 당시 부대 분위기에 휩쓸려했던 행동이 상대방에게 나쁜 기억으로 남았던 것이다. 군대에서 배운 것 중에 하나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