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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 Jan 02. 2022

좆밥처럼 사는 일에 대하여

이혁진 '관리자들'을 읽고

- 이 리뷰에는 무지막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상엔 공짜가 없어. 비용을 꼬라박고 때려 박아야 가까스로 살아지는 거라고. 그러니까 손절을 칠 수 없는 거야. 안 그러면 지금까지 처박은 게 말짱 황이 되니까 사람이란 그걸 참 무서워한단다. 말짱황이 되는 거 죄다 도루묵이 되는 거. 뭔가를 하면 계속 더 그렇게 해야 돼. 이미 했으니까. 이미 했는 데가 아니라 그게 계속되는 게 인생이야"


Mnet '쇼미 더 머니 10'에서 베이식은 '08 베이식'이라는 곡을 발표한다. 래퍼로서 최고의 루키로 주목받았던 자신의 과거와 비루했던 현재를 담은 가사다. 주변의 기대를 받았던 래퍼는 같은 프로그램에서 우승까지 차지하며 찬란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는 지금 남의 곡을 커버하는 유튜버로 서서히 침몰해갔다. '08 베이식'에서 베이식은 '지긋지긋해 사는 게 좆밥처럼 사는 게'라고 외친다. 그게 바로 그가 우승자에서 다시 참가자로 도전하게 된 이유다. 좆밥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는 도루묵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가 도전했다고 해도 단 한곡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탈락자로 잊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좆밥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모든 굴욕을 참아내고 좋은 노래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좆밥이 아니라는 것을 남긴다.


'관리자들'은 국도 옆에 관을 놓는 공사장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착한 길을 걷는 선길이 있고, 공사장을 지배하는 소장이 있다. 선길은 암에 걸린 아이를 키우는 가장이다. 이 공사장에서 밀려나면 벼랑 끝으로 밀려나는 상황에 처한 선길은 현장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면서도 꿋꿋이 버텨나간다. 소장은 자신의 부식비 횡령을 감추고 심성이 착하고 절박한 선길의 상황을 이용해서 있지도 않은 멧돼지로부터 함바집을 지키라는 명령을 한다. 선길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 한가운데서 처절하고 지독히 성실하게 허상으로부터 함바집을 지킨다. 선길이 있지도 않은 멧돼지를 지킨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건설회사의 소장과 그 밑에 있는 어리숙한 한대리와 공사장에서 잔뼈 굵은 목 씨 그리고 함바집 여주인뿐이다.


선길을 구해준 것은 굴착기 운전기사 현경. 현경은 선길이 보초 서는 것을 대신해 함바집 주변에 굴착기로 골을 파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고 실제로 그 일을 해낸다. 선길은 다시 공사장으로 돌아오고, 아들의 수술로 인해 공사장을 잠시 떠나게 된다. 소장은 선길에게 주말 회식까지는 돌아오라고 통보를 한다. 하지만 선길은 연락도 받지 않는다. 연락이 끊긴 선길은 개 두 마리와 함께 공사장으로 다시 돌아오고 개에게 멧돼지 감시를 맡기고 자신은 공사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소장에게 부탁한다. 소장은 선길에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며 마치 은혜를 베푸는 양 공사판으로 돌아가게 해준다.


아들 수술 이후 돌아온 선길은 180도 달라진다. 일에 열정을 가지며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주변의 도움을 얻어 평판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소장 조차도 선길을 반장으로 만들고 싶다고 마음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비극은 시작된다. 한 겨울 한파에도 공사를 밀어붙이는 소장에 대한 반발심과 열악한 작업 환경으로 인해 작업장 인부들은 적당히 일하고 연일 술판을 벌인다. 선길은 당연히 술을 멀리하지만 안전수칙 따위 지키지 않는 공사 현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비명횡사하고 만다. 소장은 선길의 죽음을 부주의하게 술을 마시다 벌어진 사고로 꾸민다. 소장은 돈과 착한 사람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조종하고 농락한다.


현경은 선길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자신의 굴삭기 블랙박스를 뒤지지만 이미 모든 증거는 소장이 빼돌리고 난 뒤였다. 남은 증거는 선길이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촬영했던 캠코더의 메모리뿐이었다. 그 영상에서는 선길이 우연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장면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술을 먹지 않은 증거나 다른 정황은 담겨 있지 않다. 현경은 선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지만 아무도 현경을 위해 나서지 않는다. 이미 소장이 손을 쓴 뒤였기 때문이다. 소장은 자신의 편이 아닌 현경에게 돈 3천만 원을 내밀며 조용히 있으라고 설득한다. 현경은 소장의 더러운 태도에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울분을 삭인다.

답답하기만 한 상황은 선길이 데려온 개 두 마리로 인해 반전된다. 한 대리는 선길이 데려온 개 두 마리를 애지중지 키웠다. 소장은 선길의 마지막 흔적까지 지우려는 마음으로 회식 때 개를 잡으라고 한 대리에게 시킨다. 한 대리는 개를 잡으라는 명령은 거부한다. 하지만 소장은 달라지려는 한 대리에게 달라지지 말라고 잔소리를 한다. 한 대리 역시도 분노해서 현경을 찾아와 자신이 소장의 명령을 받아서 저질렀던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공사 현장으로 도망친 개를 찾게 도와달라고 한다. 소장이 회식 때 자신들에게 사준 돼지조차 돼지열병에 걸려 살처분해야 할 돼지라는 것을 안 현경은 분노한다. 마침내 현경은 굴삭기를 끌고 회식 현장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소장에게 잔반이 든 드럼통을 쏟고, 선길이 남긴 강아지를 구해 현장을 빠져나간다.


'관리자들'은 먹고살아야 하는 인간들이 얽히고설켜있는 인간들이다. 소장, 한 대리, 선길, 현경, 인부들 등 이들이 서로 반목하고 다투는 것은 궁극적으로 회사의 이익 때문이다. 회사의 이익을 위한 공사를 진행하면서 생기는 이득을 얻기 위해 다투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고통을 받는다. 이 모든 사단이 돈 때문이며, 선길의 죽음조차 돈이 얼마나 되는지로 평가받는다. 다들 돈을 좇고 있으며, 단지 앞에 서 있는지 뒤에 서있는지 차이밖에 없다. 돈은 이름도 감정도 자비도 눈물도 없다. 불공평한 거래의 대가일 뿐이다. 지독한 거래의 끝에는 지독한 인간 혐오만이 남는다.


소장은 뻔한 악역답게 돈을 받지 않으려는 현경을 설득하면서 너도 나도 개미일 뿐이며, 크게 다르지 않다는 개똥 같은 논리를 주장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체제 하에 살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은 아니다. 인간의 가치는 속해있는 집단이 선택한 시스템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 삶의 방식과 태도가 결정한다고 믿고 싶다. 인간은 연약하고 나약하다. 영하의 추위도, 질병도, 알레르기 반응도 이겨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유한함과 위태로움과 나약함이 인간을 나아가게 만든다. 자본주의 역시도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인권 위에 세워졌을 뿐이다. 


최선을 다해 먹고 살려는 인간을 모욕하는 또 다른 인간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지 않게 자본을 이용하는 인간들을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좆밥처럼 사는 삶의 굴레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 물론 말은 쉽다. 나도 밥벌이를 위해 아무것도 손절 치지 못하는 나를 혐오스럽게 바라볼 뿐이다. 새해에는 조금 더 즐겁게 거울을 볼 수 있기를. 그런 행운이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찾아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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