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 '식물과 나'를 읽고
오직 책 표지가 예뻐서 고른 책이 재미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식물과 나'는 식물도 나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그렇게 구미가 끌리는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물로 받은 책이자 반짝거리는 초록색식물 세밀화와 파스텔톤 블루가 오묘하게 섞여있는 표지가 책장을 열게 만들었다. 예상대로 이 책은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지만 예상과 벗어나게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공감이 가는 포인트가 여럿 눈에 띄면서 책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식물과 나'는 식물세밀화가인 저자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챕터로 나뉘어서 생각나는 식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모은 책이다. 쉽게 볼 수 없는 직업인 식물세밀화가를 선택한 작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책에서는 식물세밀화가가 된 이유와 식물세밀화가로 살아오면서 지나왔던 여정들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담겨있다.
아무래도 화가인 만큼 독보적이거나 뒤통수를 치는 글 솜씨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기교보다 중요한 것은 정성이다. 익숙하지만 진실된 말들로 자신의 전문지식과 솔직한 생각들을 풀어낸다. 무엇보다 식물세밀화가라는 직업에 대한 정확한 소개와 직업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식물세밀화가는 예술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과 협업을 통해 식물의 모습을 객관적이고 활용도 높게 쓰일 수 있도록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예술적인 소양 보다는 정확하고 과학적인 소양이 더욱더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이라는 도구를 쓸 뿐 두 직업은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예술가가 아니기에 식물세밀화가는 많은 사람들과 협동을 해야한다. 방구석에서 그림만 잘 그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리고 싶은 식물을 만나는 것부터가 식물세밀화가의 일이다. 영감 뿐만 아니라 운도 따라야 한다. 식물이 그 자리에 멈춰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몇 번이나 시도하고 애써도 그릴 수 없는 식물이 있기도 하고, 그릴 생각이 전혀 없어도 눈 앞에 나타나는 식물이 있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식물과 지내는 삶을 좋아하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든다. 식물에 관심 있고 좋아한다고 하면서 괴롭히고 훼손하는 '나쁜' 인간들에게 식물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고 분명히 선을 긋는다. 작가는 "제대로 좋아하는 건 내가 좋아하는 대상이 처한 현실을 지켜보며 내 행동을 돌아보고 지속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단순히 식물과 동물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대상과 그 현실을 지켜보고 나를 돌아보는 것이 타인에게 애정을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저 두가지가 선행 되지 않는다면 좋아한다는 말은 스토커의 좋아함과 다를 바가 없다. 뜨거웠던 애정이 식는 것 역시 저 두 가지를 소홀히 하면서 생기는 일이다. 항상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집중하고 몸과 마음을 열어 놓는 것이 기본이다.
다음으로 마음에 드는 지점은 식물세밀화가로서 전문적인 지식이 드러날 때이다. 기본적으로 식물에 관심 없는 만큼 모든 식물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들국화라는 식물이 없고 구절초 등을 총칭 하는 말이라는 것이나 최근 논란과 화제를 모은 '설강화'라는 식물에 대한 설명이나 튤립의 색깔에 대한 이야기 등 나의 구미를 끄는 지식들도 물론 있다.
마지막으로는 식물세밀화가로서 프로의식이 글 곳곳에 찬란하게 자리잡고 있다. 식물을 그리는 일은 식물의 자생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고, 현미경으로 식물을 들여다 보며 형태를 기록하고, 글을 쓰는 모든 과정을 '매일 매일 ' 반복하는 행위라고 정의 한다. 조직의 일부라고 해도 그가 맡은 업무를 자세히 표현하면 단순하지 않다. 그렇게 복잡한 일들의 결과물들이 매일매일 쌓이지 않을 때도 있다. 다만 눈에 보이는 일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다른 사람의 일을 존중하는 시작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도 강렬하게 남는다. 오직 성실하게 자신의 직업과 삶을 사랑하면서 살아온 이만 할 수 있는 문장이다. 작가는 "그림은 딱 내 의지만큼 정확해진다"라고 말한다. 의지만큼 정확해 질 수 있다는 자신감과 윤리 의식을 본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