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한 씨의 삶은 비교적 순탄했다. 결혼 후에도 아내와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건강한 딸을 키워냈고, 2년 전 그 딸을 결혼시킨 것도 큰 축복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은 적었지만, 젊은 날 열심히 일한 덕에 퇴직금이라도 만만치 않았다. 근검절약하며 산다면, 노년을 편히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일상, 그 값어치를 한 씨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삶이 아니니까.'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자신에게 허락된 이 평범함에, 한 씨는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고맙게 여겨질 만한 일이란 사실에, 묘한 우월감 같은 것도 느꼈다.
퇴직 이후의 시간은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무료함이 날이 갈수록 한 씨를 짓눌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씨는 용기를 내어 독거노인 돕기 자원봉사에 나섰다. '아직 난 쓸모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봉사를 통해 만난 최 씨는 풀기어려운 수수께끼 같았다. 본인의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한 씨만은 무시하거나 거리를 두지 않았다. 말은 없지만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사람. 과거에 알 수 없는 상처를 간직한 채, 오늘을 묵묵히 버텨내고 있는 듯했다.
병원 앞에 도착한 최 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 한 씨. 여기 오긴 왔군." 무뚝뚝한 말투 속에서도, 묘한 정감이 스며 있었다. 첫 만남에서 최 씨는 '한양우'라는 한 씨의 이름을 듣곤 픽, 코웃음을 쳤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한 씨'로 불리게 되었다. 그 별명이 오갈 때면,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맴돌곤 했다. 둘 사이만의 허물없는 친밀감 같은 게, 그 호칭에 배어 있었다.
한 씨는 꼼꼼히 예약을 확인하고, 병원 측과 일정을 조율했다. 오랜 직장 생활에서 익힌 솜씨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서류를 정리하고 혼잣말로 되뇌는 모습에서, 예전 그 날카로웠던 사내가 엿보이는 듯했다. 젊은 날의 자신을 만나는 기분이랄까. 한 씨 덕분에 최 씨는 장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진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병원이란 곳은 결코 단번에 용무를 끝낼 수 없는 곳이었다. 예약하고, 진료 받고, 검사하고, 그리고 다시 결과를 듣고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인내의 행군 같았다. 시계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에 맞춰, 기다림의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창밖으로는 겨울 햇살이 나른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오늘의 미션은 최 씨의 건강 검진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한 씨는 최 씨를 살며시 바라보았다. '불편한 걸 싫어하시는데' 최 씨가 짜증을 터뜨릴까 봐 은근 조마조마했다. 꾹 참고 계시지만, 언제 폭발하실지 모를 일이었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실에 최 씨의 불평이 터져 나왔다. "피검사로 될 일을 자꾸 이러쿵저러쿵 더 해보자는 건 뭔가. 아이고, 진짜 귀찮구만!" 투덜대는 말투였다.
종합건강검진이란 이름 아래 숨어 있는 온갖 검사들의 행렬. 최 씨를 위한 거라지만, 자꾸만 검사를 거부하는 그 모습에 한 씨의 속은 복잡했다. '불평은 많이 하시지만 사실 많이 걱정되는 거겠지.' 한 씨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초조함을 달래려는 듯, 대기실을 서성이다 이내 다시 앉았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에는 꾹 참았던 한숨이 배어 나왔다. '검사 끝나고 맛있는 거라도 사 드려야지.'라는 생각을 하는 한 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