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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색 Oct 27. 2024

기침이 옮다.

4편

 "한 씨는 검진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이 답답했다. '설마 폐암은 아니겠지' 걱정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때였다.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딸에게서 온 문자였다.


'아빠, 이번 주말에 우리 집에 좀 들러줄 수 있어요?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평소와 다른 어조가 걱정스러웠다. '무슨 일이지' 한 씨는 궁금증을 감추지 못한 채 휴대폰을 껐다. 진료실 문이 열리고 최 씨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길고 긴 검진을 마친 뒤, 한 씨가 최 씨에게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르신,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삼겹살에 소주 한잔 어떠세요? 제가 쏠게요." 그리고는 살며시 팔을 내밀었다. 최 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팔을 잡았다. 차갑게 식은 최 씨의 손에서 묵직한 온기가 느껴졌다. 한 씨의 넉살 좋고 다정한 말투에, 최 씨의 마음이 절로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석쇠 위에서 삼겹살이 노릇노릇 익어갔다. "치익- 치익-" 고기가 익는 소리에 이끌린 듯, 두 사람의 얼굴이 자연스레 불판 쪽으로 기울어졌다. "어르신, 여기가 제일 맛있어요. 드셔 보세요." 한 씨가 정성스레 고른 한 점을 최 씨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이내 최 씨가 술잔을 들어 소주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투명한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온몸에 열기가 퍼지는 듯했다. 알싸한 김치는 불판 위에서 삼겹살의 기름을 머금고 금세 물들어 갔다. 봄기운 완연한 거리를 지나,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식당 안. 최 씨 앞에는 오랜만에 먹는 기름진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최 씨가 김치를 집어 고기 위에 얹더니, 한 입에 베어 물었다. 새콤한 김치 맛과 고소한 육즙이 입안 가득 번졌다. 오랜만의 식사였던지, 평소 과묵하던 최 씨의 얼굴에도 묘한 감흥이 스쳐 지나갔다. 한 씨 역시 푸른 상추에 익은 고기와 마늘, 짭조름한 쌈장을 올리고는 둥글게 말아 입에 쏙 넣었다. 이내 고소하고 신선한 맛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봄을 재촉하는 건조한 바람이 창밖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식당 안은 육즙이 튀는 소리, 술잔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어르신, 제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한 씨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식당의 뜨거운 공기를 갈랐다. "같이 지낸 지 벌써 석 달인데 아직도 어르신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어요. 궁금해요, 정말이에요." 한 씨의 솔직한 질문에, 최 씨가 잠시 멈칫했다. 술기운에 흐릿해진 눈동자로 한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낯섦과 망설임이 뒤섞여 있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최 씨가 이내 입을 열었다. "자네도 참 뭘 그렇게 많이 묻나." 투덜거리는 말투였지만,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딴청을 피우듯 한 씨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자네 딸이 하나 있다며?" 술에 절은 목소리는 평소보다 무디었다. 덧없이 흐르는 시간의 무게 같은 것이, 최 씨의 말투에 배어 있었다.     


최 씨가 딸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얼굴에 봄볕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외동딸인데, 정말 착하고 예쁘게 자랐어요. "하나뿐인 딸인데, 정말 착하고 밝게 자랐죠.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집간 지 2년이나 됐네요. 이젠 할아버지가 될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듯 딸에 대해 늘어놓던 그가 술잔을 기울였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주 한 모금에, 하루의 피로는 씻은 듯 가시고 가슴 한편이 묵직한 뿌듯함으로 채워졌다. 건강검진을 잘 마치고, 이렇게 최 씨와 담소를 나누는 일상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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