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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색 Oct 27. 2024

기침이 옮다.

5편

한 씨는 오늘 최 씨와 함께 보낸 시간이 고마웠다. 검진도 무사히 끝마쳤지만, 무엇보다 평소 과묵하던 최 씨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딸에 대해 먼저 물어봐 주어서였다. 최 씨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목을 타고 내려가는 소주 맛이 더없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신이 나서 딸부터 사위 이야기까지 줄줄 늘어놓던 한 씨를, 최 씨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문득, 쓸쓸한 미소를 흘리는 것이 아닌가. 그 웃음에는 세월의 파도에 깎이고 닳은, 아련한 추억의 편린들이 배어 있는 듯했다. 무언가 되돌릴 수 없이 잃어버린 것이 있는 사람처럼. 한 씨는 그런 최 씨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둑해진 창밖으로 바람 소리가 불어왔다. 식당 안으로 밤의 한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최 씨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다. 곱고 밝은 딸, 다정한 아내와 보냈던 시간들. 행복과 기쁨이 넘치던 그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무너진 건, 단 하루아침의 일이었다. 사업 실패의 날, 죽마고우라 여겼던 친구의 달콤한 말에 속아 전 재산을 사업에 쏟아 부은 것이다. 아내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문서에 도장을 찍었던 바로 그날, 최 씨의 인생은 깊고 어두운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지금도 그날의 후회가 뼛속 깊이 스며든 한기가 되어, 쓸쓸한 늙은 몸을 짓누르곤 했다. 창밖으로 봄을 재촉하는 바람소리가 불어오고 있었지만, 최 씨의 마음은 여전히 혹한의 겨울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밤이 깊어져 잠자리에 누웠지만, 최 씨의 눈은 좀처럼 감기지 않았다. 저녁에 먹은 고기가 체한 걸까, 뱃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서는 한 씨와 나눈 대화의 파편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오랜 시간 잊고 있던 아내와 딸의 얼굴이 아련하게 어른거렸다. 마치 그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작은 창으로 들이치는 달빛은 차가웠다. 이따금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쌀쌀한 밤공기 속에서, 홀로 누워있는 최 씨의 눈가에 물기가 얼룩처럼 번졌다.


 최 씨는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아내와 딸 몰래 보증 서류에 도장을 찍던 그 순간, '잘못된 결정이 아니길' 간절히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1997년, 대한민국은 경제 위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인해 경제는 붕괴 직전이었고, 많은 기업들이 도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최 씨의 친구는 이런 혼란 속에서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 했다. 어렸을 적부터 외동인 최 씨와 형제처럼 자란 친구의 부탁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증을 잘 못 서면 패가 망신이라는 생각으로 최 씨는 친구의 연락이 아슬아슬했다. 
 
 "이런 때일수록 기회가 있는 법이야." 친구의 말에 최 씨는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친구의 사업은 초반에는 순조로워 보였다. 몇 개월 동안 계약이 연이어 성사되었고, 매출도 상승곡선을 그렸다. 친구는 수시로 연락을 했다. "자네 덕분에 사업이 날개 달렸어. 정말 고마워." 라는 말과 함께 사례금도 보내왔다. 그 돈을 받을 때마다 최 씨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지울 수 없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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