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도 세상에서 가장 타고난 복 중 하나가 부모복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만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그 순간부터 그 생명체는 유명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부모가 한 인간에 미치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 효과는 지대하다. 나는 유순하고 대화가 잘 통하지만 때로는 우유부단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여자와 아직도 이혼을 하지 못한 아빠, 그리고 어떤 성장과정과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그러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는지 아직도 의문인 실로 설명하기 어려운 성격의 엄마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87년은 IMF가 터지기 전까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초고속 성장을 이룰 때였고 한전과 한국통신이라는 탄탄한 대기업에 다니는 부모님 하에 지방에서 거주하여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부자를 접할 환경이 못되었던 터라 요즘 아이들이 풍족한 환경에서도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특히 경제적 부분에서의 상대적 결핍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한마디로 키우기 쉬운 딸이었다. 유순하고 부모를 힘들게 하는 유형의 사춘기도 없었고, 공부도 잘했으며 HOT니 젝스키스니 덕질을 하는데 돈과 시간을 쏟지도 않았으며, 도전정신을 발휘하며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겠다고 속을 태우지도 않았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인 부모의 관점이고 나로서는 여느 10대와 다름없이 내면에서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고뇌도 있었다. 특히 힘들었던 부분은 ’ 엄마‘라는 큰 숙제였다. 지금은 꼭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숙제도 있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지붕이자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 줄 최초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만큼 절대적이고 위대하며, 동시에 위협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성인이 된 지금 네 살 어리지만 성품이 너그러운 동생과 나는 성인이지만 성인이 아닌 엄마의 ’ 어린 자아‘를 이해하고 그녀의 성장과정에서의 애정 결핍 혹은 그와 비스름한 것들로 인해 형성된 결코 온화하지 않은 성정에 대해 안쓰러워하지만 우리가 어릴 당시엔 엄마의 화는 그야말로 화산 대폭발이었다.
어릴 적부터 ’ 무서운 ‘ 엄마 덕에 혼날 만한 짓은 애초에 하지도 않으려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무슨 이유인지도 모를 만큼 사소한 일들로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맞기도 하였고, 동생이 맞을 때 말리다 맞기도 하였다. 그저 어린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내가 그렇게 잘못을 한 건 아니지만 그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를 외치는 것이었다. 한바탕 화산폭발이 이루어지고는 엄마도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사과를 하기도 했었는데 어린 나는 그 사과마저 감지덕지하며 받아들이는 선택지 외에는 없었다.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방법은 없다는 걸 어린 시절에도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엄마가 사는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학교와 학원을 다니고 성인이 될 때까지의 보호와 경제적 지원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아마 네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없었다면 혼자선 버티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성인이 된 지금도 같은 부모와 같은 어린 시절을 공유한, 도저히 친구를 포함한 타인은 이해하기 힘들 디테일한 상황과 감정들에 대해 나눌 사람이 있다는 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엄마의 신체적, 언어적 폭력은 고등시절까지 이어져왔고(물론 평소엔 보통의 엄마와 같았다. 밥을 정성스레 차려주고, 야자가 끝난 시각 버스정류장 앞으로 마중을 오고, 간식을 챙겨주고, 건강을 걱정해 주고. 하지만 내 친구가 말하길 엄마들은 원래 다 그런 거라고 했다. 세상에 ’ 원래‘라는 건 없지만 말이다.)
엄마를 증오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내가 얻는 게 뭐지? 나만 손해 아닌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버티기로 했다. 지방에 살던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탈출하면 이 집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래 지기를 싫어하고 근성이 있는 편이었던 나는 ’ 엄마‘요인으로 더더욱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완전히 좋기만 한 것도 없듯이 완전히 나쁜 것만도 없었다. 한때는 멍이 들도록 맞아도 10대의 자존심에 친한 친구에게조차 말 한마디 안 했지만 지금은 그로 인해 좋았던 것과 얻은 것도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태어났더니 엄마였던 사람에게 얻은 것은 뾰족하고 이상한 사람에 대한 관용, 인간에 대한 이해심, 맷집, 근성, 냉철한 이성, 회복탄력성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