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여주,남주
내 동생이나 친구들은 한번쯤 나에게 말했었다. “드라마 찍어?”
그렇다. 나는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남자의 ’ 남‘, 연애의 ’ 연‘도 시작하지 못했으나 20대는 공부로 낭비하지 않기로 했기에 20대는 사랑으로 불살랐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물한 살 동아리 OB선배였던 사람과의 첫사랑. 마흔이 다되어 가는 지금도 떠올리면 한편이 말랑말랑해진다. 너무나 말랑말랑했던 그 시절 나로 되돌아간 것 같다. 여과 없이 사랑하고 여과 없이 슬퍼했던 그때의 나와 풋풋하고 아름다웠던, 실은 그리 길지도 않았지만 잊는 데는 십수 년이 걸린 것만 같았던 첫 연애. 지금 생각하면 20대의 특유의 연애와 사랑, 그때의 마음은 수십억, 수백억으로도 못 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건 얼마나 값진 걸까.
세상을 잃은 것 같았는데 그로부터 몇 년뒤 또 세상을 뒤흔들 것 같은 사랑을 하고 또 이별을 했다. 그때의 이별은 정말 서로 너무 사랑하지만 우리 가족, 종교, 결혼으로 이어지기엔 현실적인 측면 등 외적인 요인으로 인한 것이었기에 더 구구절절했다. 두 개의 큰 사랑과 이별 사이사이엔 자잘한 만남과 연애도 있었지만 나의 세상을 뒤흔들 만큼은 아니었기에 열외로 친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은 또 제3의 인물이다. 죽을 듯이 사랑하고 드라마 찍듯이 요란하게 연애하고 이별한 나를 지켜본 친구들이나 동생으로서는 우스울 수도 있다. 그때가 언제였나는 듯 지금의 남편과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베프 H양은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남자 친구와 10년 넘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내가 만약 그랬다면 나는 조금 아쉬울 것 같다. 첫사랑이든 두 번째 사랑이든, 이루어지지 않은 결말을 맺지 않은 사랑은 가슴속 한편 추억의 책꽂이에 영원히 꽂혀있어서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다.
어쩌면 그 애틋함과 말랑말랑한 마음은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남편과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하겠지만 한 번씩 꺼내볼 수 있는 나만의 비밀책장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그들을 남편 몰래 사랑한다 거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랑이라는 달콤한 설탕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소주가 쓴 지도 모를 만큼 쓰린 가슴으로 살았던 천국과 지옥의 시절에 무방비의 나를 던져 넣었던 그 용기와 패기. 순수한 마음이 떠올라서 몽글몽글해지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나에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말해주고 싶다.
끝이 무엇이든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무조건 사랑하고, 마음 가는 대로 해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