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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물고기 Jan 04. 2024

너무 오래 졸인 연근

일상 에세이

처음으로 연근조림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레시피를 보니 물과 올리고당 간장을 넣은 후 약불에 연근을 조리기만 하면 끝이었다. 너무 쉬운 거 아니야? 하는 마음으로 야심 차게 연근을 조리기 시작했고 중간중간 뒤적여주었다. 희멀건 연근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다 모두 한여름 피서를 다녀온 얼굴들처럼 까무잡잡해지자 불을 끄고 연근 하나를 들어 맛보았는데 맙소사 그건 간장을 얼려놓은 것처럼 짰다.


희멀겋던 얼굴들이 점점 짙어지다가 물들어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 깊고 진하게 물들어버린 그 색과 향이

마치 원래 연근의 그것이었던 것처럼.


깊이 물든다는 건 너무 오래 졸인 연근과 같아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까 간장과 올리고당을 만나기 전으로.


나도 깊이 물든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또는 어떤 믿음에.

영원히 끓여도 졸아들 것 같지 않은

연근의 단단한 얼굴처럼

사랑한 적도 있다.


얼마나 많은 간장을 가슴속 깊이 머금어가는지 모른 채

뜨거운 화기를 묵묵히 견디면서 그만 멈추기를 기다리는

연근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건 어떤 걸까.


다음엔 너무 오래 졸이지 않기를.

나의 연근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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