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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물고기 Jan 05. 2024

너무 미안해서 화를 내버렸다.

일상 에세이

나는 아들 둘을 키운다.

어느 날 저녁 무슨 일로 한 명이 찡얼거리고

두 명이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한껏 예민해진 나는 세탁실에서 일을 하다가 다가오는

둘째를 보고 방에 들어가라며 문을 닫듯이 밀었다.

문을 잡고 있던 작은 손가락을 보지 못한 채.

거의 닫힐 뻔했던 문에 손가락이 다친 둘째가 울기 시작했고 나는 미안하단 말 대신

도리어 화를 내었다.

그러니까 방에 들어가라고 하지 않았냐고.


3초도 안돼서 옹졸한 나 자신에게 더 화가 났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사람들은 가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잊어버리는데

그런 이유로

너무 미안할 때 화를 내곤 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해 주거나

내가 해주는 것보다 상대가 해주는 것이 많을 때

미안할 만한 일을 한 상대가 약한 존재거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확신할 때

비겁하게도 화를 낸다.


화라는 감정에는 권력이 들어있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는 말처럼

내가 화를 내도 안전한 사람

내가 화를 내도 여전히 나를 사랑해 줄 사람

내가 화를 내도 후폭풍을 맞지 않을 사람에게

화를 낸다.


치졸하지만 그렇다.


어떤 소설에선가

간도 쓸개도 다 빼주는 애인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네가 해주는 것들이

다 갚아야 할 빚처럼 느껴진다고

숨 막힌다고 말하며

이별을 고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너는 왜 항상 날 미안한 사람으로 만드냐며

세차게 화를 내던 다른 소설의 한 대목도.


인간은 천성적으로 빚을 지고 싶지 않은 걸까.

투자와 레버리지라는 명목으로 은행에 지는 빚보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지는 마음의 빚이

천근만근 더 무거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미안한 순간

발칵 화를 내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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