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지개물고기 Jan 10. 2024

우리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사신다.

일상 에세이

할머니는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 무렵까지

나를 돌봐주셨다.

엄마와 아빠 두 분 다 출근을 하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아들만 넷이었고,

셋째 아들인 우리 아빠가 처음으로 딸을 낳았는데

그게 바로 나였던 것이다.

아들에, 손주들마저 남자들뿐이었기에 나의 존재는

그저 딸이란 것만으로도 예쁨을 받았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 통통하고 못생긴 아기 때부터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흡사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느낌으로.

유치원쯤 돼 보이는 사진에서도 할머니의 '신경 쓴' 코디가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 그 통통하고 못생겼던 아기는 자라서 대학교를 가고, 취업을 하고, 가정을 꾸려 아이들을 키우며 남들 사는 것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고 있다.

그러는 동안 할머니는 늙었다.

조금씩 늙는 것 같았는데 내 인생을 정신없이 사는 동안

더 많이 늙어갔다.

그리고 100세에 가까운 지금. 우리 할머니는 요양병원에서 살고 계신다.

'산다'라기보다는 '살아 있다'는 말이 어울리는 곳에서.

요양병원에 살고 계시는 동안 배은망덕한 손녀는 다른 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일하느라 바쁘다는이유로, 코로나로 인해 면회가 제한된다는 이유로, 이런저런이유로 자주 찾아가지 못했다.


어린 시절 기억은 대부분 휘발된다.

아주 좋았거나 나빴거나, 혹은 특이했거나 하는

어떤 지점만 사진으로 찍은 듯 조각조각 기억난다.

놀이터에서였나.

그네를 타고 싶다는 어린 나를 위해 할머니가 계속

그네를 타고 있던 다른 아이에게 양보를 부탁했던 것 같다. 아니 그네를 타고 있던 다른 아이와 다툼이 있었던가.

너무 어릴 때 기억이라 희미하다.

하지만 그때 할머니가 내편을 들어주었던,

그래서 굉장히 든든했었던 그 느낌만은 생생하다.

할머니의 키가 나보다 높았고 뭐든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나무 같았던 시절이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돈다.

100년 가까이 돼 가는 여기저기 고장 난 몸을 가지고

그저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요양병원 침대에 누워 그 몸마저 스러질 날을

기다리는 심정은.

나는 그러한 마음들을 차마 상상하기조차 싫다.

살아간다는 건 미래를 계획하고, 즐거운 일을 하고,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것과 같은 것들인데

우리 할머니는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걸까.

그저 먹먹하다.


태어나는 게 선택이 아니듯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선택할 수 없다.

탄생은 대개 사람들의 환대와 웃음이 함께하지만

소멸의 과정은 초라하고 때로는 비루하다.

비루함을 견뎌내는 것까지가 삶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할머니가 정말 소멸된다 하더라도

슬프겠지만 내 삶은 또 이어질 것이다.

아이들을 걱정하고, 대출금을 갚고

때로는 즐거움도 느끼면서.


할머니라는 단단한 땅 위에서 단비 같은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라났듯

다음 생이 있다면 내가 할머니의 할머니,

아니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가습기 관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