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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정과 열정사이 Oct 19. 2023

39살에 그림책 수업을 듣다.

새로운  날선 감각


코로나가 닥친 그해는, 모두가 그랬듯이 집콕과 산책만 하는 단순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전 해에, 암 수술을 받았기에 난 더욱 그랬다. 그러다 지금처럼 가을이 되었고, 그날따라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러다 "백만 번 산 고양이"라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제목의 책을 인터넷서점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사노요코 작가의 에세이가 당시 인기여서, 연관검색어로 뜬 듯)표지 그림의 당당한 눈빛의 고양이도, 뭔가 내 마음을 끌었다. 

(사노 요코, 비룡소)



그렇게 나의 첫 그림책과 만났고, 추운 겨울이 가고 쌀쌀한 봄이 성큼 다가왔다. 코로나는 제대로 한창이었고, 난 그 겨울 중학교 이후 처음으로 손바닥만 한 노트에, 아무거나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책의  첫 장면은 '결핍'이 있는 아이가 나옵니다.

 온라인으로 그림책수업을 처음 듣는 날, 작가셨던 강사님이 첫인사를 마치고 바로 하신 얘기셨다.


 사실 나는, 그전까지 그림책은 만화책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 정도로 난 그림책이란 분야가 생소했다. 그 수업을 용감하게 들은 것도, 휘황찬란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아닌 아이디어 소재 찾기, 낙서정도의 그림이면 된다는(학원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서였다. 걱정보단 막연히 기대감이 들었다. 어릴 적 생각을 했다. 내가 미술시간에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었던 것을. 그리고, 자기 전 동생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장면도.


암환자가 된 이후로, 난 어떤 사실을 깨달았는데 난 36살까지 제대로 마음껏,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마치 절간에 수행자처럼, 아주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과를 보냈다. 낮에 고양이와 산책, 운동 한 시간, 밥 먹고 쉬기. 일기 쓰기처럼 브런치글만 간간이 올렸다. 기존에 친구, 지인 동료 중 극소수 빼곤 연결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일 년 반의 목적 없는 쉼 속에서, 가벼워지자 다음텀인 것처럼 자연스레 넘어가졌다. 비우면 채워지는 항아리 같았다. 저절로 뭔가 해보고 싶은 욕구가 떠올랐다. 내가 좋아했던 것들, 주변여건에 포기했던 소망들. 그중에 하나가 그림 그리기였다. 글과 연관 짓다 보니, 그림책 글쓰기 수업이 보였다. 갑작스레 온라인으로 북적이는 사람들, 아티스트를 꿈꾸는 이들과의 첫 대면을 했다. 그 작가 지망생들은 약간의 긴장감과 호기심 어린 얼굴 정도였지만, 나는 드디어 절간에서 탈출해,  일 년 반 만에 문명을 접하고 피 끓는 느낌이었고, 신선한 흥분이 마구 샘솟았다. 그것도 기분 좋은 설렘이.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는 처음엔, 어두운 성안에 꽁꽁 갇혀있다. 

(성안에 갇혀있는 왕자일까)

그림책 시작 역시, 외로운 아이가(주로) 나온다. 그들은 죄다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다. 아이러니한 건, 그런 결핍이 없다면 그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그날은 첫날이기에, 강사님은 다양한 그림책들을 소개해주듯 보여주시며, 좋은 장면들을 소리 내어 글귀를 읽어주셨다. 우리는 말없이 책의 장면을 보고 들었다. 그중에, 내가 유일하게 읽은 "백만 번 산 고양이"가 있었다.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아는척하고 싶고, 반가웠다.

 '뭘까, 이 차분한 공기는.... '성인인 내가 마치 유년시절로 돌아가, 엄마가 잠들기 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베드타임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놓칠세라,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고, 그림책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들었다.


그림책, 장면들은 어쩜 이렇게 환상적일까!


그림과 전혀 상관없이 39년 살다가 보니, 장님이 눈 뜬 것처럼(정말 그랬다), 그 다채로운 색과 조형의 세계가 놀라움 가득이었다. 처음 보는 아름다운 그림체들에 '우와' 감탄만 나왔고, 난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새로운 감각, 느낌들이 날 가득 채웠다. 나를 제외한 모든 수강생들에겐, 익히 잘 알고 있는 유명 그림책들이었지만, 내게는 다 처음이었고 신세계 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그 시간을 음미했고, 마지막 순서까지 정말 신나서 몰입할 수 있었다. 과제는 감각을 깨우는 연습이었다. 오감에 맞는 사진들과 그 느낌을 단어로 써보라고 하셨다. 그래, '감각'이구나.., 평소에 잠자던 오감이 이런 느낌이었구나. 난 그다음 수업도, 다다음 수업도 과제를 성실히 냈고, 내가 낸 과제 중엔 초등학생이 그린 낙서 같은 장면들도 있었다. 


'이걸 보고, 누가 비웃으면 어쩌지?' 하는 우려가 살짝 들었다. 아 그럼, 난 이렇게 대답해야지!. "전 그림이 처음인데요? " 그리고 내 맘대로 그리면 그게 그림이지, 뭐 별 건가.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내게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게 난 생초짜일 뿐이다. 초등학생이 된 39살 늦깎이 입문수업이었다. 나에겐 제2의 기회 같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게 그 자체가 난 그저 좋았다. 이 시작이,  암이 내게 건네준, '숨겨진 보석이 아니었을까 '난 그렇게 슬쩍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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