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날선 감각
코로나가 닥친 그해는, 모두가 그랬듯이 집콕과 산책만 하는 단순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전 해에, 암 수술을 받았기에 난 더욱 그랬다. 그러다 지금처럼 가을이 되었고, 그날따라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러다 "백만 번 산 고양이"라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제목의 책을 인터넷서점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사노요코 작가의 에세이가 당시 인기여서, 연관검색어로 뜬 듯)표지 그림의 당당한 눈빛의 고양이도, 뭔가 내 마음을 끌었다.
그렇게 나의 첫 그림책과 만났고, 추운 겨울이 가고 쌀쌀한 봄이 성큼 다가왔다. 코로나는 제대로 한창이었고, 난 그 겨울 중학교 이후 처음으로 손바닥만 한 노트에, 아무거나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책의 첫 장면은 '결핍'이 있는 아이가 나옵니다.
온라인으로 그림책수업을 처음 듣는 날, 작가셨던 강사님이 첫인사를 마치고 바로 하신 얘기셨다.
사실 나는, 그전까지 그림책은 만화책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 정도로 난 그림책이란 분야가 생소했다. 그 수업을 용감하게 들은 것도, 휘황찬란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아닌 아이디어 소재 찾기, 낙서정도의 그림이면 된다는(학원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서였다. 걱정보단 막연히 기대감이 들었다. 어릴 적 생각을 했다. 내가 미술시간에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었던 것을. 그리고, 자기 전 동생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장면도.
그림책 시작 역시, 외로운 아이가(주로) 나온다. 그들은 죄다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다. 아이러니한 건, 그런 결핍이 없다면 그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그날은 첫날이기에, 강사님은 다양한 그림책들을 소개해주듯 보여주시며, 좋은 장면들을 소리 내어 글귀를 읽어주셨다. 우리는 말없이 책의 장면을 보고 들었다. 그중에, 내가 유일하게 읽은 "백만 번 산 고양이"가 있었다.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아는척하고 싶고, 반가웠다.
'뭘까, 이 차분한 공기는.... '성인인 내가 마치 유년시절로 돌아가, 엄마가 잠들기 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베드타임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놓칠세라,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고, 그림책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들었다.
그림책, 장면들은 어쩜 이렇게 환상적일까!
그림과 전혀 상관없이 39년 살다가 보니, 장님이 눈 뜬 것처럼(정말 그랬다), 그 다채로운 색과 조형의 세계가 놀라움 가득이었다. 처음 보는 아름다운 그림체들에 '우와' 감탄만 나왔고, 난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새로운 감각, 느낌들이 날 가득 채웠다. 나를 제외한 모든 수강생들에겐, 익히 잘 알고 있는 유명 그림책들이었지만, 내게는 다 처음이었고 신세계 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그 시간을 음미했고, 마지막 순서까지 정말 신나서 몰입할 수 있었다. 과제는 감각을 깨우는 연습이었다. 오감에 맞는 사진들과 그 느낌을 단어로 써보라고 하셨다. 그래, '감각'이구나.., 평소에 잠자던 오감이 이런 느낌이었구나. 난 그다음 수업도, 다다음 수업도 과제를 성실히 냈고, 내가 낸 과제 중엔 초등학생이 그린 낙서 같은 장면들도 있었다.
'이걸 보고, 누가 비웃으면 어쩌지?' 하는 우려가 살짝 들었다. 아 그럼, 난 이렇게 대답해야지!. "전 그림이 처음인데요? " 그리고 내 맘대로 그리면 그게 그림이지, 뭐 별 건가.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내게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게 난 생초짜일 뿐이다. 초등학생이 된 39살 늦깎이 입문수업이었다. 나에겐 제2의 기회 같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게 그 자체가 난 그저 좋았다. 이 시작이, 암이 내게 건네준, '숨겨진 보석이 아니었을까 '난 그렇게 슬쩍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