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도 '정기검진' 전날이 되면 막연히 검사를 미루고 싶어 진다. 나를 환자로 상기시키는 흰색의 커다란 대학병원이었다. 길고 긴 대기줄을 따라 자리에 앉아 내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익숙한 얼굴의 흰가운을 입은 교수가 반가운 듯 인사한다.
"요즘은 몸이 어떠세요? 별일은 없으세요?" 그는 모니터 속 수치들과데이터를 재빠르게 보고, 이어서내 상태를 두 눈으로 스캔한다.
"네, 괜찮아요"
"검사 결과는 다행히 아무 이상 없습니다. 아, 그리고 이제 5년이 돼서 산정특례가 끝나네요.."
'5년이라..,' 이제 완치라는 건가 물으니 현재로는 그렇다고, 객관적 데이터를 중시하는 의사다운 대답을 했다. 거기엔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그렇지, 나는 몸에 이상이 없었고 현재 건강하기에 이렇게 검진도 혼자 아무렇지도 않게 가는 것이겠지. 퍽 반가운 소식이었다. 대기실에 앉아있는 무수한 환자들의 근심 어린 표정들이 그 재서야 눈에 들어왔다. 나도 딱 저런 표정으로 5년 전에 이 대기실에서 초조해하며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까운 약국으로 가서 지시된 약을 타고, 전철을 타러 걸었다. 병원밖을 나오니, 다행히도 가을의 청량한 파란 하늘이 날 반겨주었다.
벌써 4시가 훌쩍 넘었는지라, 허기가 졌지만 식당은 내키지 않아서 프랜차이즈 빵집에 들렀다. 빛이 들어오는 곳에 널찍한 공간이 있었고 테이블이 서너 개 있었다. 내가 앉은 옆 테이블엔 한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역시 빵을 받아서 앉았다. 무겁지도 그렇다고 유쾌하지도 않은 적절한 고요함이었다. 잠시 전, '완치'라는 의사의 말, 한마디를 곱씹으며 커피 향이란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옆 테이블의 그녀는 이내 앉자마자 어딘가로 전화를 했고, 반가운 듯 한 옥타브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나야, 병원 방금 갔다 와서 검사받고 이제 막 나왔어" , "응 수술하고 이제 괜찮다고.." 등등의 말이 오고 갔다. 병원 앞에 있는 빵집이라 자연스레 같은 병원 환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 동질감 같은 것이 문득 생겨났다.
"응 그래서 의사가 이제 모래더라. 관해? 완치 같은 거래.."
(응, 나랑 같네. 이 아줌마도 암환자였나 보네)
그런데 아주머니는 말을 더 하려다가 "아 나간다고. 그래 바쁘지, 담에 통화하지 모.., " 라며 전화를 끝냈다. 전화를 다소 일찍 끝냈다고 여겼는지, 약간 아쉬움이 있었다. 그녀는 약간 시무룩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잠시 쳐다보더니.. 고개를 이래저래 한 번씩 돌리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내 테이블 위 약봉투를 보고선 "아, 여기 병원 다녀오셨나 봐요~"라고 말을 건넸다.
난 살면서 이런 일이 자주 있는 편이라 놀라진 않았고, "네에~ 맞아요"라고화답했다. 어디가 진찰을 받았는지부터, 수술을 했는지도 어느새 묻고 있었고 그녀는 유방암환자로 수술을 5년 전에 받았고 몇 차례 항암치료도 받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아.. 저는 산부인과요. 근데 저도 오늘 5년 차 검진이었어요. 이상 없데요ㅎ"
"오, 저도요! 둘 다 암환자였네. 호호. 저도 완치예요 신기해라"
나는 모르는 타인에게 "오 축하드려요!! 참 다행이네요" 웃으며 말을 건넸고, 그녀는 "고마워요, 그쪽도 참 잘됐어요"라며 축하의 인사를 들었다. 서로 한해의 덕담 인사를 주고받듯이 특이한 상황에 낯선 타인의 축하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는지, 좀 전에 쓸쓸함이 사라진 밝은 미소였다. 나는 그녀의 맘 한편에 '내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잠시 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잘 아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가 아니더라도..,나 또한 적시에, 이런 대화로 위로가 됐던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대화를 나누고, 건강하세요, 잘 지내요'라며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한참 전철을 타고 내려서 마을버스 정거장을 걸어갔다. 길고 긴 전철에서의 시간이 흘렀는지,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빵집에서 오래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었다. 동그란 녹색의 버스 정류장 표지판을 보면서, 어딘가에서 올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곧 오겠지' 했던 마을버스는 삼십 분째 오지 않았다.
내 뒤에 줄은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고, 하늘은 아예 깜깜해졌다. 이곳은 병원 검진 올 때만 지나치는 곳이었는데, 역 주변에 물건을 널려놓고 파는 상인들과 과일가게, 생선가게, 떡집등이 보였다. 기다림에 너무 지겨워져서 줄을 벗어나, 꽃집 앞을 왔다 갔다 하는데, 그 옆 허름한 상가에서 하얀 와이셔츠에 조끼를 입고 팔토시를 한 중년의 남자가 내 뒤의 할머니들에게 말을 걸었다. 무언가 전단지를 보여주며, 솔깃한 목소리였다.
"여기 이 초음파 기계, 누구 박사가 발명해서 특허를 냈는데..., 어르신들이 이거 쓰면, 무릎 관절에 직빵이야. 온몸에 염증이 싹 사라지고, 한 달만 아니 일주일만 쓰면 허리가 펴지고... 아픈 데가 싹 사라지고..."
흰머리의 할머니 두 분은 호기심이 생겼는지 '약 파는 아저씨'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래 걸린 검사와 장거리 전철 때문인지, 이 낯선 전철역 주변이 멀리 여행온 느낌 같은 게 들었다.'약팔이 아저씨'의 말발에 할머니들이 넘어가지 않길 바라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렸다. '이 버스가 존재하긴 하는 건가..' 다른 마을버스는 열대도 더 온 거 같은데, 하필 내가 탈 이 버스는 어딘가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원래 없는 번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언가 이 공간이 비현실적인 분위기였다. 아저씨의 약팔이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시끄러운 나머지 나는 꽃집 앞에서 역 주변을 멀리 쳐다보았다. 그 순간, 빨간색 네온간판이 보였다. '모텔 르 에 ㅇ 스? '하도 오래된 곳인지, 낡은 네온 간판은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르네상스였나 보네...' 그리고 그 옆엔 '모지? 홈?!'이 있었다.
초승달 곁에,HOME 이 있었다! 놀라운 순간이었다.
이 이상하고 낯선 여행지, 타지인의 약팔이 광고를 듣는 와중에, 나타난 '홈'은 오렌지 빛이었고 노란 금빛의 가로등 불빛 위에떠있어서 마치' 섬'같았다. 그때, 예수님이 가라사대 '외로운이여, 가난한이여, 모두 내게로오라...' 그런 성경구절이 떠올랐다.딱 어울리는 광경 같았다. 쓸쓸한 이, 가난한 이, 돈을 벌어야 하는 이, 가족이 없는 이, 길 잃은 어린양들 모두..., 이 '홈'으로 오라. 이곳은 그대들의 지구별의 홈이 돼주리라... 초승달은 나와 이들을 공평히 비쳐주고 있었고, 밤공기는 시원했다.
이 순간의 적막함이 내 마음에 달빛처럼 들어온다. 그리고 모두를 아름답게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이 버스를 기다리는 한 무리의 타인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어릴 적 들은, 성경구절이 절로 떠올랐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문득, '버스는 안 올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몽상에 빠져있는데, 눈을 드니 어느새 녹색 동그란 차가 오고 있었다. 버스 번호는 정확히 내가 기다린 그 버스였다. 그렇다, 이 버스는 존재했고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현실과 공상이 지금 만났다. '꿈의 정거장'이 리얼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자유로움을 느꼈다. 한없이 커지고 광활해진 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