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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시선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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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정과 열정사이 Oct 16. 2024

노인의 시선

낯선 시선을 마주하다

흰색의 숱 많은 머리의 노인이었다. 아직 11월 초인데, 자주색 패딩을 입은 채 길을 걷고 있었다.


두 명이 채 걷기 힘든 좁은 길 위로, 그 바로 옆은 일차선의 한적한 도로가 지나고 있고, 붉은색 벽돌의 오래된 주택이 몇 채 보인다. 새로 지어진 주택과 상가들, 신가지와 구도시가 어울려진 그런대로 여유로운 동네 분위기였다. 일차선 도로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아, 소음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내 시선이 닿은 자리에 그가 있었고, 그는 걸음걸이가 무척 독특했다. '뚜뚜벅, 뚜우벅' 리듬감 있는 느린 보폭이었다. '다리나 몸이 불편한 분인가...' 건너편 카페 창가에 있던 나는 시선을 돌리려다가, 나도 모르게 눈이 향했다. 그 노인은 지팡이나 휠체어를 의지할 만큼은 아닌지, 그런 사소한 쩔뚝거림을 무시한 채 '나는 걷는다, 그뿐이다' 이런 태도로 걷는것 이었다. 그 무심함에 끌려, 나는 커다란 창으로 보행자인 그를 잠시 바라본다. 무언가가 다른 보행자와는 확연히 달랐다. 걷는 리듬이 있어 그 박자감이 묘하게 중독적인데가 있었다. 아주 호흡같이, 슬로우 스텝으로 걷는다. 순식간에 이제 나는 관객, 그는 무언가 공연을 하는 사람이 되버렸다.


자주색, 파란색이 반반 섞인 두꺼운 패딩 때문인지, 그는 어디 다른 시공간에서 온 사람 같이 보였다. 그 노인에겐, 시간도 계절도 별 의미가 없어보였다. '내가 걷겠다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 같았다. 무심하고,이질적노인에게서, 나는 서늘해진 공기 냄새 같은 것을 맡았다. 그대로 올리브색, 황갈색 이파리들이 무성한 가을의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건 아무 의미도, 집착도 판단도 없는 시선이었다. 그 노인조차도 거리 풍경의 일부분같이 느껴지는.


'아뿔싸!' 난 순간 멈칫했다' 발을 끌듯이 걷던 노인이 갑자기 나를 '뻔히'쳐다보는게 아닌가. 나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우리는 일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향한 시선을 의식했다. '헉....'소리가 날만큼, 꽤나 이상한 순간이었다. 나는 이런 적이 좀처럼 없었다. 대부분은 우연히 고개를 돌리다 눈이 마주해도, 몇 초 지나지 않아 바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나나 상대 중에 한 명이 말이다.


이 나라에선 그 '시선'하나에 큰 의미를 둔다. 온갖 불안과 모욕과 시비의 의미로 등장한다. 이제 몬 사태가 날지도 몰라..,하면서, 그럼 둘 중에 한 명은 시선을 거둬야 한다 묵시적으로 말이다. 난 원래대로라면 시선을 피했겠지만, 이경우엔 나도 그 방향이었기에 돌리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살짝 부아같은게 올라왔다. 이미 지나갔으면 아무 일도 없는 건데 말이다. 이 노인은 '잠시멈춤' 버튼을 누른 것처럼 길에 정지를 했다. 그리고 몇 초인가가 나를 지긋이 쳐다본다. 그 두눈은 물론 고운 눈은 아니다. '아니 왜?이해할수 없다'라는 의아함의 시선이었다. 그때까진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시선은 일종의 공격일까, 모지 이 눈빛은... 나도 그대로 멈춰 그를 향해 쳐다본다. '에라 모르겠다' 원래대로라면 일부러라도 시선을 돌렸을 텐데..,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종의 기싸움이 돼버렸다. 난 그냥 내가 하던 대로 할 뿐인데, 이노인은 나를  왜 불쾌하게 노려보고 있는가 말이다. '모, 나이를 따지며, 경로사상을 원하는 건가' 그렇게 일분쯤인가 시간이 흘러가는게 손에 잡히는 기분이었다. 그와 나 사이의 간격은, 두세 걸음만 걸으면 닿을 아주 가까운 거리였고, 놓인 것은 오로지 카페 창문일 뿐이었다. 이제 나는 불쾌감을 넘어서, 긴장이 되고 있었다. 나의 두 눈은 좀 전의 관찰이나 호기심을 버린 지 오래다. 아까의 전투력도 이제 '훨훨'버려버렸다. '제발, 이젠 그냥 지나가시오...내가 졌소'


앗차! 그런데, 그 노인이 아예 몸을 트는 게 아닌가. 걷는 도보 방향이 아닌, 90도 튼 정면의 시선이 돼버렸다. 그리고, 대놓고 앞에서 날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에서 이제는, 강렬한 증오의 시선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제 호흡을 중지한 채, 버릇처럼 숨을 '꼭' 참았다. '뻐끔뻐끔' 숨을 참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내 눈은 바닥으로 자연히 향했고, 이제 그 시선을 피했다. 그 피함은 '난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요'라는 평화선언 같은 의미였다. 자극을 받았던 내 피부는 살짝 식은땀이 나왔고, 나는  전쟁에서 도망가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젠 제발 지나갔어라...'


그러나 내 기대와 다르게, 그는 그대로 건재했다. 이제 그의 표정은 좀 전의 분노에서, 조금은 바뀌어있었다. 무얼까 저 희미한 표정은...., 난생, 처음 보는 얼굴 같았다. 그건 어떤 젊음에 대한 부러움도 한탄도 아닌 '무' 그 자체였다. 좀 전까지의 긴장 가득한 적의는 사라졌다. 약간의 호기심도 있었던 그 얼굴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자의 얼굴, 공허함으로 바뀌어있었다. 굳은 오래된 나무껍질 같았다. 고목나무가 된 채로  남은 밑둥같이. 잠시인지, 그 영혼이 이곳을 떠나버렸다. 그의 두 다리는 종속된 채 힘겹게 끌려가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의 생기는 사라졌다. 어디론가 멀리.


그는 다시 이제 걷는다. '쩌얼. 뚝' 이번엔 리듬이 다시 바뀌었다. 더욱 더, 천천히 그는 걷는다.한쪽 어깨는 심하게 기울어져 그 수평이 맞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처음처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에게 몸은 원래, 그런것이다.


'휴우....' 난 심호흡을 쉰다. 이제서야 그 시선 공격에서 완전히 해방됐다. 그 잠깐 사이에, 푸석푸석한 나무 겉 등을 손으로 만진 느낌이었다. 잠깐의 오기로 마주했던 공격성, 분노, 허탈한 눈길을, 반항심으로 똑같이 마주했다. 그때 내 눈빛은 그에게 불온, 반항, 고집 같은 걸로 보였으리라. 그래서 그는 한결 더 진해진 불쾌감으로 되돌려 주었던 것이다. 그 '관찰자'에게..., 나는 노인이 지나간 자리에서,' 휘이이잉' 바람소리가 들리는 거친가을의 황무지를 보았다. 그 곳은 드넓고 황혼이 져가고 있었다. 기다란 갈대로 가득차서, '휘이잉'바람 소리에 갈대들이 마구 흔들렸다.


거기서 노니는 커다란 들개, 그 들개는 많이 지쳐있었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무한한 해방감을 느꼈다. 때마침, 황혼이 지고 있었다. 저녁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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