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온실 속의 화초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편의점, 빵집, 과외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용돈을 마련해 대학을 다녔고, 부모님의 큰 도움 없이 제 앞길 잘하며 살았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곱고 귀한 딸이긴 했지만, 씩씩하게 잘 자란 잡초 혹은 들판의 야생화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이토록 멀리 떠나보고서야 부모님의 온실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물리적으로 독립은 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부모님 그늘 아래 있었다.
귀가가 늦어지면 항상 지하철 역까지 마중 나와 계시던 엄마와 손 잡고 걸었다. 주말에는 함께 쇼핑하고 공연도 보고, 맛집도 다니면서 엄마와 나는 서로에게 가장 편한 친구였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아빠 손에는 내가 좋아하는 도넛과 꽈배기가 들려 있었다. 항상 적당히가 없어서 아이스크림이든, 빵이든 맨날 왜 이렇게 많이 샀냐고 엄마한테 타박받으시곤 했다.
나이가 들어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어렸을 때 아빠가 그러셨던 것처럼 퇴근길에 가족들 좋아하는 간식을 사 가지고 들어가곤 했다. 동생한테 뭐 먹고 싶은 거 없는지 물어보고 집 앞 마트에서 사가지고 들어가면 마음만은 안 먹어도 배불렀다. (물론 마음만. 안먹진 않았다.) 직장 생활도 뿌듯했지만, 가족들을 챙기면서 많은 보람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는데도 어쩐지 내가 우리 가족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결혼하고 멀리 떠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혼하면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으셨다던 부모님도 늘 그렇듯 나의 선택을 믿고 지지해주셨지만 아쉬움은 감추지 못하셨다.
호주 생활에 적응이 안 될 때마다 한국 생각이 났고, 자연스레 가족이 보고 싶었다. 호주에 살고 있는 형님들이 곁에서 막내 동생인 남편을 챙길 때면 나도 한국에 있는 친정 식구들이 그리웠다. 매장에 온 모녀 손님만 봐도 괜스레 코 끝 시리던 때였으니 비자 문제로 묶여 있다가 2년 만에 한국에 들어갔을 때, 인천 공항에서 부모님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컥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요즘 시대에 무슨 이산가족 상봉도 아니고 오버야 싶겠지만 한창 마음 힘들 때이니 충분히 그럴만했고, 나는 정말 잘 운다.)
호주 레스토랑에서 은근한 인종차별을 받았을 때의 설움도 있지만, 혼자 일하다 공격적인 사람을 만났을 때 함께 반응하고 지켜주던 사람들도 있다. ‘이럴 땐 어떡해야 하지?’라는 매뉴얼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자주 얼굴이 빨개졌고, 웅크려졌다. 나는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바운더리 안에서만 자신감이 넘쳤던 거다. 그래서 겁 많고 소심해진 내 모습들이 영 나 같지가 않았다.
‘혼자 여행을 한다는 건 나를 보호하고 있는 누군가로부터, (…) 가장 멀리, 멀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자신만만히 믿었던 것들을 검은색 매직펜으로 지워내는 일이다.’
_이병률, <혼자가 혼자에게>
나도 그렇게 하나씩 지워내고 수정해야 했다. 언어가 채워지고, 타국 문화에 익숙해지니 연약했던 자신감도 다시 튼튼해지기 시작했다. 안온했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공간이 익숙한 그림체가 돼가는 동안 내 조심스러움과 걱정과 두려움은 깨지고 세상은 그만큼 넓어졌다. 호주에 온 걸 후회한 적은 열 손가락에 다 꼽지도 못할 만큼 많다. 하지만 이만큼 멀어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내 삶의 보람의 많은 부분을 가족에 대한 책임감 안에 두고 살았을지 모른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나의 자리이고, 나의 가장 큰 보람은 내 안에 있는 것을.
둔한 나는 이제야 눈치를 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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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장녀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내 MBTI를 보니 너무나 정확했다. ISFJ는 용감한 수호자라고도 하는데, 조용하고 차분하며 따스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친근함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책임감과 인내력이 강하다 보니 친구와 가족 등에게 애정을 많이 가지는 타입이라고.. 너무 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