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보면, 손님들이 내 이름을 종종 물어본다. 자주 오는 손님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나가다 들른 손님들도 가끔 묻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 나는 초면에 만난 사람의 이름을 묻거나, 매장에 가서 직원 이름을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다. 명찰의 이름을 확인하게 될 때는 뭔가 컴플레인을 하고 싶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손님들이 내 이름을 물어보면 알려주기 싫었다. 그저 이름일 뿐이고 실명도 아닌 영어 이름이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물어보니 경계심이 들었고, 불편했다. 뜸을 들이다 이름을 말해주면, 손님들은 내 이름을 정확히 부르려 노력하며 ‘Thank you’라는 말과 함께 악수를 청했다. 그냥 고맙다고 인사할 때보다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그저 이름을 불러줬을 뿐인데.
내 영어 이름은 Stella였다가 Jennifer였다가 지금은 Jenny다. 몇년 전, 아르바이트 끝나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심심했는지 말을 걸어와서 호주는 어떻게 오게 됐냐, 학생이냐 물어보길래 남편과 워킹홀리데이로 왔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호주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날씨부터 자기 아이들 이야기까지 하는 그 사람이 좀 유별나기는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얘기가 길어져서 서로 통성명까지 하게 되었는데, Stella라는 내 이름을 듣더니 나와 잘 안 어울린다며 이름 바꾸지 말고 한국 이름을 쓰라고 했다. 결국 버스 안에서 메모를 하더니 내 자리까지 와서 건네줬다. 초면에 오지랖도 참.. 싶기도 했지만 사실 나도 입에 붙지 않아 영 어색해하던 이름이긴 했다.
몇 년 후, 어학원에 영어 수업을 들으러 가면서는 이름을 Jenny로 바꿨다. 그런데 수업 첫날, 이미 수강 중인 학생 중에 똑같은 이름이 있어서 선생님은 나중에 들어온 내 이름을 Jennifer로 하자고 했다. 지금은, 누군가 내 이름을 물어보면 Jenny라고 한다. ‘지은’이라는 한국 이름을 얼마 동안 쓰다가, ‘은’의 발음을 매번 교정해줘야 하는 게 내가 불편하고 번거로워서, 영어 이니셜 J와 E가 들어가는 것 중에 쉬운 이름으로 지었다.
하지만, 영어 이름을 말하게 될 때면, 진짜 내 이름이 아니어서 그런지 아직도 조금은 어색하고 내 껍데기가 불리는 느낌이다. 한국과 호주에서의 생활이 달라진 것처럼, 한국에는 ‘지은’이 있고, 호주에는 새롭게 시작한 ‘제니’로서의 삶이 있는 것만 같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굳이 내 진짜 이름을 알려주기 싫을 때나,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내 이름을 물어볼 때는 영어 이름을 알려주는 게 더 편하기도 하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내가 이만큼 당신을 신경 쓰고 있어요’의 가장 쉬운 표현이다. 첫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호주인 사장은 나를 꼬박꼬박 한국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한인 가게에서 일할 때는 당연히 한국 이름으로 불렸고, 외국인 동료들은 (대부분이 동생들이었다) ‘지은 언니 unnie’ 혹은 ‘지은 누나 noona’라고 불렀다. 이름이 불리면 심리적 거리감은 조금 더 친밀해지고, 상대에게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난히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 재주가 없는 사람도 있겠고, 단지 불러야 하니까 기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그래도 이름은 존재성을 드러낸다. 누군가 지나가며 '꽃이 너무 예쁘네'라고 말하기보다, '벚꽃이 너무 예쁘게 피었네'라고 말했을 때 고개를 돌려 바라보고 싶어지는 것처럼.
카페 일을 시작하고, 주말이면 늘 비슷한 시간에 들러 항상 아이스 롱 블랙을 주문하는 덩치 큰 호주 청년이 있다. 아마도 근처에서 일을 하는 것 같은데, 몇 주간 내 근무 시간에 계속 마주치다 보니 반가워서 어느 날 덜컥 손님한테 커피를 건네며 이름을 물었다.(주문할 때 이름을 물어보는 카페도 있겠지만, 내가 일하는 곳은 대신 번호표를 준다.) 스스럼없이 손님에게 이름을 물어보다니. 내가 해놓고도 어느새 나도 호주물 많이 먹었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올 때마다 Sam도 Hi, Jenny, How are you? 하며 전보다 더 웃는 얼굴로 주문을 한다.
영어 이름이 해외 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도 않고, 발음이 어려워도 한국이름을 그대로 쓸 수도 있다. 오히려 영어 이름을 쓰는 걸 이해 못하는 호주 사람들도 있을 정도니까. 진짜 자신의 이름을 쓰라는 조언은 정류장에서 만난 아저씨 이후로도 몇 번 들었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불려온 내 진짜 이름 말고, 호주에 와서 내가 만든 내 이름도 나름 의미는 있는 것 같다. 흔하디 흔한 영어권 나라의 여자 이름이지만, 내가 특별함을 부여했으니까.
드라마 속 주인공 대사처럼, 내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가 있다.
‘지은아, 너 너무 잘하고 있어!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마.’
어쩐지 좀 걱정되고, 긴장될 때 자주는 아니고 남편 몰래 종종 해보는데 생각보다 진짜 힘이 난다. 그래도 아직 'Jenny' 라는 이름으로 저 말을 하기에는 너무 오글거린다. 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