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은 Oct 21. 2021

좋아하는 걸 한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를 준다.

'무슨 일을 해야 할까'의 답은 언제나 '좋아하는'이었다.

잔 위에 봉긋 올라온 카푸치노 거품에 동그란 하트가 예쁘게 올라갔다. 완벽하지 않은데도 ‘너무 예쁘다’는 손님의 말이 고마웠다. 그렇게 싹 비워진 커피 잔들을 볼 때마다 전에 없던 뿌듯함이 일고, 일하면서 이렇게 즐거웠던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날은.. 새벽에 영 잠이 오지 않아서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보다가 오랜만에 한인 커뮤니티에 들어갔는데, 한 디저트 카페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구인 글을 읽게 됐다. 지금 하고 있는 근무시간과 겹치지 않는 주말 저녁이었고, 무엇보다 ‘커피는 일하면서 배울 수 있습니다’라는 한 문장을 보는 순간, 마음이 심하게 동하기 시작했다. ‘하고 싶다’는 마음에 두근거리기까지 해서 잠 못 드는 밤, 더욱 뒤척이게 했다. 되든 안되든 면접이라도 보고 싶은데, 그 기회마저 없어질까 봐 급해진 마음에 이튿날 바로, 저녁에 이력서를 가지고 방문하고 싶다고 연락했다. 


한살이 많아질수록 겁나고 두려웠다.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해, 이 나이에 지금 하는 일이나 잘해야지.. 해보기도 전에 선부터 그었다. 그런데 그 걱정 많던 사람은 어디로 내빼고, 남편에게 ‘해볼래’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력서를 만들고 면접 볼 생각을 하다니.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구한 이 일이 정말 내 일이 되려고 했던 건지.. 카페 일을 시작한 지 얼마 후, 나는 6년 넘게 해온 세일즈 일을 마무리하게 됐다. 단지 투 잡을 하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주말에 시작한 아르바이트 덕분에 나는 일상에 더 활력이 생기기까지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정말 엄청난 에너지를 줬다. 체력이 의욕을 따라가지 못한다고만 생각했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해보니 어디서 이런 힘이 나는지.. 8시간 반을 일하고 나서도 또 커피를 만들러 가는 그 시간이 즐겁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저로부터 더 많은 일들이 내게 넘어오게 되었을 때, 벼랑 끝에서 이제 그만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버티고 서있다가는 떨어질 것 같았다. 일이 익숙해지는 동안 자연스럽게 턱까지 쌓인 스트레스를 애써 삼켜내던 날들이었다. 


2015년에 애들레이드에 온 이후, 6년 2개월. 어쩌다 보니 한국에서 직장 다닌 햇수를 합한 것보다도 긴 시간을 그곳에서 일했다. 그저 집 근처라는 이유만으로 이력서를 내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시작했는데, 은근 나랑 잘 맞는 부분도 있었고, 잘 안되고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때때로 다른 일을 병행하다가 그만둘 때도 있었지만, 이곳은 애들레이드 정착 때부터 지금껏 나의 메인 잡이었다. 


근무 마지막 날 , 친한 언니가 ‘기분이 어때? 시원섭섭하지 않아?’라고 물었을 때, 비로소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 해야 해서 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즐기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영어도, 일도 부족할 때도 있었지만, 꽤 오랫동안, 기특하게, 난 할 만큼 충분히 잘했다. 그래서 아쉬움 없이 떠나고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그동안 고마웠던 보스의 마지막 인사 문자를 보니 진짜 끝난 게 실감이 됐다. 





커피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는, 내가 생각보다 훨씬 이 일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쉬는 날에도 카페가 한가할 시간에 나가 몇 시간씩 커피 연습을 했다. 커피 종류, 우유 종류에 따라 다른 스티밍 방법도 익혀가고 라테 아트도 계속 연습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내 손인데도 왜 이렇게 마음대로 안되는지 쉽지 않았다. 늘 플랫 화이트만 마셨었는데, 새로 알게 된 더티 차이 라테, 피콜로 라테에도 빠지게 됐다. 


내가 만든 커피가 처음으로 서빙이 되었을 때는, 너무 신이 나서 함께 일하는 직원들 앞에서 방방 뛰면서 좋아했다. 그 순간은 정말 감동이었다. 우유 폼도 잘 나왔고, 라테 아트까지 완벽했다. 커피를 배우고 싶어서 혼자 멀리까지 가서 수업을 들었고, 유튜브로 바리스타 영상을 매일같이 보던 날들이 결국 결실을 맺었다. 


한국에서 좋아하는 일은 '책'과 관련된 일들이었다. 호주에 와서 비슷한 일을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나는 해야 하는 일을 해왔다. 그러면서 계속 고민해왔던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까’의 답은 언제나 ‘좋아하는’이었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니 습관처럼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가보고 싶은 곳은 항상 새로 생긴 카페였고, 가장 좋은 시간은 카페 가서 책 읽는 순간이었다.





스물아홉에 첫 이직을 했었는데, 서른아홉에도 새로운 일이 찾아왔다. 신기하게 나의 아홉수는 매번 이렇게 옆구리 쿡쿡 찔러서 나를 다른 라인에 데려다 놓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일하다가, 이제는 함께 일하는 것도 좋고, 무엇보다 배우고 싶었고 좋아하고 재밌는 일을 찾게 돼서 일상 에너지가 다시 파바박 튀기 시작했다. 호주에서도 마침내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게 감사하다. 그리고 꿈꿔본다. 몇 년 후 동네 골목 어딘가에 자그마한 카페를 하나 열어서, 내가 커피를 내리고, 남편이 옆에서 마들렌을 굽는 우리의 40대를. 책도 함께 볼 수 있는 북카페라면 더 좋겠다. 


지금은 2개월 차, 초보 바리스타가 되었다. 

커피 내리는 그 순간이 향긋한 커피 향만큼 행복하다. 


 





이전 09화 호주에서 평생 살 것도 아닌데, 집을 꼭 사야 할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