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점점 쌀쌀해져 침대에 온수매트를 깔고, 애매한 날씨에 아직까지 꺼내져 있던 반팔들을 넣으려고 옷 정리함을 꺼냈다. 일 년에 두 번, 여름과 겨울에 계절 옷 정리를 할 때면 자연스럽게 내가 가지고 있는 옷들을 거의 전부 꺼내놓게 된다. 정리하면서 잘 안 입는 옷들은 버리려고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아 고작 한두 벌씩만 마음먹고 버릴 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곤도 마리에의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는 <정리의 힘>이라는 책에서 ‘물건을 하나하나 만져보고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말한다. 정리를 위해서는 버리기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남길 물건을 구분하는 가장 간단하고 명쾌한 방법이라고 한다. 미니멀리스트까지는 아니지만, 항상 집에 있는 물건들을 좀 정리하고 싶었기에, 이 참에 가장 쉬운 옷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았다.
곤도 마리에의 말을 생각하며 꺼내놓은 옷들을 하나씩 만지기 시작했다. 정리하겠다는 눈으로 보니, 비로소 버릴 옷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었다. 그중에 가장 어려운 건, 추억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옷들이었다. 만지면 충분히 설레지만 입고 나갈 일이 없거나 맞지 않아 입을 수도 없는, 주로 한국에서 가져온 정장들이다. 바쁘고 즐겁게 일하던 20-30대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다시 입으면 그때만큼 자신감 있게 살아질 것 같고, 젊고 예뻐 보일 것 같은 옷들이다. 거기에 묻은 추억들을 차마 버리지 못해 입지도 않으면서 앨범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늘씬하게 들어맞던 정장 원피스와 예쁜 스커트들은 허벅지에서 걸려 더 이상 올라가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트위드 재킷과 코트들과 하늘하늘한 블라우스들은 숨을 참고 입어도 양쪽 팔을 다 넣기도 힘든 게 현실인데 말이다. 옷을 버린다고 추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옷을 잘 버리는 이성적인 남편에 비해, 적어도 감성이 10배는 더 많이 장착되어 있는 나는 사실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이 비단옷뿐만이 아니다.
처음이 어려웠지만, 마음먹고 나니 버릴 옷을 구분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추억으로만 가지고 있던 옷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많이 정리했다. 낡은 옷들은 버리고, 입을만하지만 더 이상 필요 없는 옷들은 집 근처 의류 정리함에 가져가려고 따로 챙겼다. 담아 보니 큰 종이 백 두 개가 나왔다. ‘언젠가’의 마음으로 가지고 있던 정장 스커트와 바지, 블라우스, 가방들이었다.
오래된 옷들을 마침내 정리하고 나니, 지금의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더 잘 확인할 수 있었다. 비워진 정리함과 옷장에 채워진 루주 핏과 박시한 프리사이즈 옷들. 바지는 블랙 아니면 그레이 레깅스가 대부분이고, 만만한 스트라이프 디자인은 긴팔, 반팔, 속옷, 양말 할 것 없이 또 왜 이리 많은지. 내가 줄무늬 옷을 볼 때마다 남편이 말릴 만했다. 입는 옷들만큼이나 나는 호주에서 캐주얼하게 일하고, 헐렁하게 지낸다. 타이트한 정장을 입을 때는 그 시간을 살아가는 것도 타이트했다. 주말까지 계획과 약속들로 채웠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그렇게 아까워 잠자는 시간도 미루면서 뭔가를 해야 했다. 나를 위해서 혹은 일을 위해서. 그러다 호주에 와서, 타이트한 삶에 맞춰 조여 놓았던 허리띠를 풀었을 때 나는 갑자기 헐렁해진 일상에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호주의 젊은 시인, 에린 핸슨 Erin Hanson의 ‘아닌 것(Not)'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배우 공유가 <유 퀴즈 온 더 블록> 방송에서 인생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 시를 언급했다. 일부를 적어보자면,
아닌 것 (Nothing)
- 에린 핸슨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와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중략)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당신 방에 걸린 사진들이고
당신이 꿈꾸는 미래다
당신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당신이 잊은 것 같다
당신 아닌 그 모든 것들로
자신을 정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는.
옷장을 열고 한국에서 가져온 예쁘지만 입지 못하는 옷들을 볼 때면 종종 우울했다. 나는 레깅스에 운동화보다 다시 정장에 힐을 신고 싶었다. 호주 생활이 불편했고, 만족스럽지 않았다. 스트레스에 눌려 자꾸 살이 찌고 우울해져 가는 모습들을 부정하고 싶었다. ‘진짜’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입지도 못하는 옷들과 함께 과거의 나의 건강함과 반짝임을 그리워했다.
결혼이 내 인생의 첫 독립이었고,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호주의 작은 도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나는 모든 일에 자신감 가득했을 때라 인생이 바뀔만한 계획 앞에 두려움이 없었다.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시작이 기대되고 신났지만, 막상 와보니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복잡하지만, 즐길 거리 많은 서울에서 주로 지내다, 영주권을 위해 한적하고 여유로운 도시로 오니 심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성격은 점점 소심해졌고, 사는 게 점점 재미없어졌다. 지금의 내가 그렇지 못하기에, 더욱더 지난날의 자신 있고 젊고 활기찬 모습만 그리워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를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맞지 않는 정장들을 버릴 마음이 생겼다. 그것들을 버림으로써, 오롯이 ‘지금의 나’만 보였다. 그리고 현재의 내 모습이 곧 미래라 생각하니, 미래의 내게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익숙하고 안정적이긴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에 10여 년 만에 학교를 가보려 한다. 이민자가 되었기에 호주 사람들과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언어적인 부담감도 있고, 졸업 후 당장 취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적어도 기회는 생길 테니 그건 미래의 내게 맡겨 보려 한다. 시도하고 경험하고 나면, 그것만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버티는 지금보다 덜 후회하고, 더 나은 내가 될 테니까.
옷장을 정리했으니, 다음에는 그릇 정리를 해야겠다. 가지고 있는 물건들의 볼륨을 생각하며 의식적으로 늘리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나중에 보면 버린 만큼 어느새 야금야금 쌓여있다. 옷장을 가득 채워두었다고 든든한 게 아니라, 오히려 바람 들 공간이 있어야 적당한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안 입고 더 이상 쓰지 않을 마음일랑 그때그때 정리해야 미련이 덜 남는 것 같다. 그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지만, 연습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