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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Oct 18. 2020

나도 이런 내가 처음인데 어떡해

처음이자 마지막이길 바라는 나의 우울증에 대한 짧은 고백

집 근처 도서관에서 한국 에세이 6권을 빌렸다. 출간된 지 10년 된 책도 있지만, 채 1년도 안된 신간들을 호주의 한 지역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다니. 기쁜 마음으로 도서관 카드를 만든 지 4개월, 한 달에 한 번씩 다녀오고 있다. 이번에 빌린 6권 중에 3권쯤 읽었을 때, 작가들 모두 정신과 치료나 우울증 상담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유명한 가수였고, 인기 있는 에세이스트였으며, 일러스트레이터였다. 내용을 알고 빌린 건 아니었는데..  

     

그들의 고백이 나를 위로했다.      


호주에 오고 몇 년간 우울증이 심했다. 성급한 이민 결정에 대한 후회와 깊어만 가는 향수병, 더 떨어질 곳 없어 보이는 자존감과 이 모든 걸 데리고 손님처럼 꼬박꼬박 찾아오는 우울이라는 감정.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더 외롭고, 알 수 없는 허무함이 가득 찼다. 이런 감정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처음에는 무시했다. 곧 사라지겠지. 며칠 좀 힘들다가 말겠지. 평소처럼 일을 했고, 일부러 맛집을 찾아다녔고, 아름다운 바닷가로 드라이브를 갔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점점 웃음도 적어지고 우울해지는 나를 옆에서 안아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남편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가 혼자 감당하고 빠져나와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한국보다 70배는 더 넓은 호주에서 홀로 고립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털어낼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일과 인간관계 속 스트레스까지 점점 머리와 마음속에서 무거워져 갔다. 그 무거워진 돌덩이를 이고 지고 잠잘 수도 없었다. 조금씩 물들어 가기 시작한 '우울'이란 감정은 좋아하는 많은 것들로부터 의욕을 단념시켰다. 산책을 나가기도 싫었고, 1년에 책 한 권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내 몸은 여기에 있는데, 머리와 마음은 항상 나를 버리고 나갔다. 툭하면 눈물이 났고, 가슴 한가운데가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묵직하니 아팠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괜히 걱정 끼치기 싫어 항상 '잘 지낸다'고 말했다. 학교 다니면서 일까지 하는 남편에게 계속 힘든 모습을 보이며 우울한 감정을 전이하기도 싫었다. 꾹꾹 참고 지내는 법이 더 익숙한 나는 그저 자신에게 견디라고 강요하고만 있었다. 


눈치와 배려 사이에서 나는 내 진짜 감정을 숨기기만 했다. 


그러다 지인이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다는 말에, 처음으로 상담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호주 사람이 내 우울함에 문화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지, 말하고 나면 나를 동정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을지 두려웠다. '한국으로 돌아가라'며 내가 어쩌지 못할 상황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실망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답답한 내 마음이 영어로 제대로 전달될 수는 있을까? 죽을 만큼 힘들긴 해도 정말 죽고 싶을 정도는 아닌데.. 나 같은 사람이 가도 될까? 등등.. 나는 정작 상담이나 병원 예약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고 다른 걱정을 하며 소심하게 찌그러져 증상만 키우고 있었다. 

    

그 깊기만 했던 우울의 늪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수술도 한 번 하고, 입원도 두 번 하고, 고마운 인연들을 만나며 마음도 회복해갔다. 꽤 오랜 시간을 앓아오며 한 발, 한 발, 가끔은 그냥 서 있기도 했고 때로는 반걸음씩 걷다 보니, 안 끝날 것 같은 그 터널이 어느새 저만큼 뒤에 있었다. 온전한 내 마음으로 회복해 돌아오기까지, 그 터널이 오래 걸렸던 이유는 그런 내 감정에 대해 제대로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전 알게 된, 브레네 브라운 교수의 '취약성 Vulnerability'에 대한 강의. 단어만큼이나 그 의미도 낯설었다. 나의 취약한 마음과 상처와 약점에 대해서라면 항상 도망치고 감춰 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용기 있게 드러내라는 메시지가 처음엔 어려웠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그 강의를 10번쯤 보게 되었고, 나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고백하며 '자신이 먼저 내 편이 돼라'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내가 지금 이대로도 얼마나 충분한지를 자꾸 잊어버리지 말자는 마음에, 요즘 주문 외우듯이 중얼거리는 가수 화사의 노래 한 구절이 있다.  


빛나는 밤이야, 널 괴롭히지 마.

뭐 하러 아등바등해, 이미 아름다운데.

- 화사, <마리아>


다음 우울증이 예약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꼭 오겠다면 그때는 좀 더 솔직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용기 있게 쏟아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런 내가 더 이상 초면은 아니니 반드시 괜찮아질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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