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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Feb 01. 2021

스몰 토크하다 이직을 하기까지

Small Talk, Small World 스몰 토크, 스몰 월드

  처음 본 손님이었다. 적어도 내가 근무하는 날에는 만난 기억은 없는, 남미 출신으로 보이는 60대 아저씨였다. 내가 모든 손님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일하다 보면 다시 오는 손님은 신기하게 머리에 저장이 된다. 그날, 그 손님은 매니저를 찾았지만, 나 혼자 일하는 날이었다. 내게 제품 문의를 하고 나서, 돌아가기 아쉬우셨는지 잠시 이런저런 스몰토크를 하게 됐다. 마침 다른 손님도 없어서 자연스럽게 날씨와 코로나에 대해 얘기하게 됐는데, 이야기 좋아하는 아저씨의 말에 이끌려 점점 미디엄(?) 토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저씨는 어떻게 자신이 내가 일하는 매장까지 오게 되었는지, 자신의 사업 이야기까지 하시며 처음 보는 내게 10분 넘게 이야기하셨다.       


  그러다 아저씨가 애들레이드에서 40여 년 경력을 가진 디저트 회사 사장님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주저 없이 물었다.



"내 남편이 페이스트리 셰프인데 이번에 코로나 때문에 직장을 잃었어.

혹시 직원 구하고 있으면 남편 이력서 한 번 보내도 될까?

OO 호텔에서 페이스트리 셰프로 5년 일한 경력이 있어.

지금 자리가 없더라도 나중에 사람 필요할 때 한 번 검토해 줘."          



  남편이 오래 일하던 호텔을 나와 이직하려고 했을 때, 호주에도 코로나가 급 확산되었다. 정부의 영업 규제가 발표되었고, 수많은 비즈니스가 영향을 받아 문을 닫거나 영업시간을 조정해야 했다.  모든 호텔은 문을 닫았고, 언제 다시 영업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많은 사람들이 실직자가 되었고, 남편도 셰프라는 직업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후 코로나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구직은 쉽지 않았다. 이직이 예정되었던 곳 역시 문도 못 여는 상황이라 계속 연기만 되고 있었다.      


  다행히 내가 일하는 곳은 규제의 영향을 받지 않아 계속 일할 수 있었다. 그렇게 5개월이 지나, 어느 날 이 손님을 만났고, 자연스럽게 남편의 이야기를 하게 됐다. 아저씨는 본인의 이름을 알려주며 이력서를 보내달라며 나에게 흔쾌히 명함을 건네주셨다. 명함을 보니 레스토랑이나 카페의 진열장에서 자주 보던 익숙한 회사명이었다. 며칠 후, 남편은 잘 다듬어진 이력서를 보냈고, 인터뷰를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인터뷰를 본 다음날, 오전에 몇 시간 트라이얼도 했다. 아저씨와 내가 이야기를 나눈 지 약 2주 만에, 남편은 그렇게 새 직장을 구했다.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10분여의 짧은 만남이었다. 처음 보는 손님과 나눈 스몰 토크가 남편의 취업까지 이어질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만약, 그날 내가 아니라 매니저가 일했다면, 아저씨가 본인의 회사에서 약 30분이나 떨어진 그 가게로 오지 않았다면, 내가 그 손님에게 남편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평소와 다름없는 날들이었을 것이다.


Who knows? It's a small world!     

  그날, 명함을 건네주며 아저씨가 했던 말이다. 정말 사람일 참 모를 일이다. 그날의 모든 우연들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새 일자리는 꽤나 만족스러운 곳이었고, 약 4개월을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남편은 오늘부터 풀타임(한국의 정규직) 계약을 하고 기분 좋게 출근을 했다.         

  

  자신이 꼭 운명론자가 아니더라도, 살다 보면 가끔 ‘우연’이 ‘운명’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운명이라는 건, 비로소 훗날의 결과를 통해 ‘그럴 운명이었어’라고 이름 짓게 되기에 결코 미리 알 수가 없다. 나 역시 소개팅으로 남자 친구를 만났을 때, 결혼해서 호주까지 오게 될 줄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일이니까. 하지만, 돌아보면 눈에 띄지 않는 우연들이 마침내 운명이었다고 여겨지게 되는 때는 평소와 다른 ‘용기’가 필요한 순간들이었다.



  남편이 취직한 후, 나는 그날 그 손님을 만난 것에 대해 ‘운이 참 좋았다’고 이야기했다. 남편은 단지 ‘운’이 아니고, '내가 용기를 냈기 때문’이라고 말을 정정했다. ‘어떻게 자신의 이력서 얘기를 꺼낼 생각을 했냐’고 놀라워했지만, 나에게는 그게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꼭 큰 용기만이 대단한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흔들리는 다리를 건너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고,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묻는 것도 용기임은 분명하니까. 나는 안 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꺼냈고, 그로써 훗날 있었을지 없었을지 모를 기회를 꽉 잡았다. 물론, 남편까지 준비가 잘 되어 있기에 그 결과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휘재의 '인생극장'처럼 양갈래 길의 결과를 모두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매일, 해야 하는 사소한 선택들은 분명히 크고 작은 용기로부터 비롯된다. 마치 다른 쪽 한 발을 내딛는 것처럼 그게 자연스러워 보일지라도 그 용기로 어제와 다른 오늘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극적인 ‘운명’이 되기도 한다. 약 20여 년 전 방송되었던  이휘재의 '인생극장'처럼, 살아가면서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만 할 때, 양쪽 선택의 결과를 모두 알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매 순간 우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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