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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l 06. 2023

냉장고 안에 내 마음이 있었다

  단언컨대 저는 절대, 절대로 미니멀리스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수시로 문방구에 가서 지금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귀여운 문구류 쇼핑을 즐기고, 지나가다 눈길을 사로잡는 그러나 쓸 일은 없(다는 것을 아)는 일명 예쁜 쓰레기를 돈을 주고 사 오기도 하지요. 그것들은 주로 미래의 어느 날에 쓰임을 얻기 위해 진열 또는 보관되어 있지만 대청소를 하는 날이면 '처박혀' 있던 예쁜 쓰레기가 되어 과감하게 쓰레기 종량제 봉투로 들어갑니다. 슉! 


  하지만 제가 유일하게 미니멀하게 관리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냉장고 안입니다. 지금 사용하는 냉장고는 6년 전에 산 것인데 '가전은 LG'에서 나온 제품입니다. 그전에는 '최강 SAMSUNG'의 냉장고를 사용했는데 이사를 몇 번하고, 바깥 베란다에 두었더니 고장이 나서 바꾸었습니다. 비록 용량도 다르고 회사도 다르지만 제가 냉장고를 대하는 방식은 공평합니다. 되도록이면 식재료나 음식을 쟁여놓지 않고, 수박 하나 또는 큰 냄비가 하나 들어갈 정도의 공간을 칸칸마다 유지합니다. 유독 냉장고에만 미니멀을 고집하는 이유는 딱히 없지만 가득 찬 냉장고의 문을 열 때마다 새어 나오는 냄새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체기관 중 코가 제일 예민한 편입니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아침 여덟 시가 되어 일어났습니다. 평소처럼 6시 30분에 일어났으면 억울할 뻔했는데 눈 뜨기 딱 좋은 시간에 일어난 셈이지요. 블라인드를 돌돌 말아 올리니 아침 햇살이 거실창으로 성큼 들어옵니다. 불타는 금요일을 보낸 것은 아니지만 전날 자정을 넘겨 잠자리에 든 탓에 식구들은 아직 잠을 자고 있습니다. 고로 저는 지금 혼자입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메뉴도 아직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요. 

  '우선 음악부터 틀어볼까?'

  뜬금없이 마흔을 넘기고 힙합 R&B 음악에 빠졌습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 싶지만 자고 있는 식구들이 최대한 늦게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잠이 솔솔 오는 연주곡을 BGM으로 까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숲의 고요함, 힐링 피아노 뉴에이지 Forest Calm, Healing Piano Music - YouTube


  고요한 토요일 아침, 혼자만의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시간입니다. 그래도 소파 팔걸이를 베개 삼아 누워 책을 읽으려다가 전날 밤에 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노트북을 켰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시계의 짧은바늘은 벌써 9자를 향해 가고 있었고 뱃속도 출출해질 때가 되었습니다.  

  '뭐 먹을 게 있나?'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악! 뭐가 이렇게 많아?

   

 

 (먼저) 엄마, 정말로 미안해요.

  냉장고 안에는 엄마가 보내주신 반찬들이 잔뜩 쌓여있었습니다. 빽빽하게 말이죠. 지난 3월에 아이들이 개학을 해서 바빠질 딸의 끼니를 걱정하며 바리바리 싸주신 반찬, 4월 초 여행을 가시기 전에 보내주신 반찬까지 엄마가 정성스레 보내주신 반찬은 대략 2개월 동안 냉장고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지요. 매일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눈으로 보고도 못 본 척했나 봅니다. 오늘은 그나마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겼는지 눈에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요. 과감하게.


  (다시 한번) 엄마, 정말로 미안해요.

  냉장고에 있는 반찬통을 싹 꺼냈습니다. 귀한 반찬들은 때를 놓쳐 아니 저의 게으름으로 '음식물'이라는 이름표 뒤에 '쓰레기'라는 단어를 달았고, 매일 뭔가를 가득 담고 무겁게 살던 통은 이제야 비우면 가벼워진다는 것을 깨우칠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싱크대가 가득 찼습니다. 음식물 쓰레기 봉지도 가득 찼고요. 엄마가 보내주신 반찬을 버렸다는 미안한 마음과 환경을 오염시켰다는 죄책감도 점점 커졌습니다.


용기(容器)가 아니라 용기(勇氣)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비우고 씻고, 식기 건조대 위에 빈 용기를 차곡차곡 쌓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오니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냉장고가 다시 텅 비었습니다. 빈 냉장고를 보고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불도 더 밝게 켜지고요. 마치 마음속에 있던 묵은 짐을 치워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미안한 것은 한 번 더) 엄마, 정말 미안해요.

  다행히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도 식어갑니다. 음, 냉장고 속 찬 공기에 마음이 식는 것인지 이미 지나간 일이니 점점 잊어버리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문득 요즘 들어 머릿속에 너무 많은 것은 담고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일을 할 때도 끊임없이 더 잘 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생각을 멈추지 않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분명 같은 시간이라도 더 잘 보내고 싶은 마음과 함께 욕심도 들어있을 것입니다. 미래를 떠올리면 더더욱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온종일 떠오르는 글감과 첫 문장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기도 하고요. 약간의 허풍을 떨자면 요즘 저는 숨을 쉴 때도 '어떻게 살 것인가?'고민을 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제 일상에도 바람이 드나들 구멍이 필요합니다.


  냉장고를 비우며 공간을 만들고, 용기(容器: 물건을 담는 그릇)를 비우며 용기(勇氣)를 얻었습니다. 복잡하고 촘촘한 시간이 주는 정진하는 에너지도 소중하지만 지금은 마음속 공간을 비우고 정리하며 채울 결심이 필요한 때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몸과 머리의 균형을 맞추고, 신속하게 결정해야 하는 일과 천천히 시간을 두어야 하는 일, 더 중요한 것과 미루어도 되는 것의 균형을 맞추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번 주말에는 나를 위한 시간을 선물해 주어야겠습니다. 가까운 숲길을 걸으며 내 안에 있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작은 결심에 벌써 주말이 기다려지네요.


  독자님의 오늘 하루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하나 찾아낼 수 있는 시간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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