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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n 16. 2023

차도 장비발

  커피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게 참 어렵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끊었는데 커피는 끊을 수가 없습니다. 노력으로 커피를 줄일 수는 있지만 끊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도 이틀에 한 번은 커피를 끊을 결심을 하며 작심이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포기하지 않고 말이에요. 커피를 끊으려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맞추는 바로 그 이유입니다. 수면을 방해해서요. 되도록이면 이른 시간인 오전 9시쯤에 커피를 마시지만 그래도 어떤 날은 새벽 1시가 넘도록 잠을 못 이룰 때도 있습니다. 물론 꼭 커피 때문이 아닐 수도 있어요. 글을 쓰며 생각이 많다 보니 생각이 나면 또 글을 쓰고, 글을 쓰면 읽고 싶고 읽다 보면 더 고치고 싶고, 생각이 많아지고... 라임이 아주 장기하 님의 <부럽지가 않아> 노래와 만나면 찰떡같지만 아무튼 생각이 많아서인지 커피 때문인지 늦은 밤이 되도록 자주 깨있습니다. 아마 오늘도 그런 밤을 맞을 것 같습니다. 


  커피를 덜 마시기 위한 노력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부터 끓이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쓰자면 물이 부글부글 끓을 때 제 마음에도 갈등이 부글부글 생겨납니다.


커피를 내릴까, 차를 내릴까.


  이 내적갈등은 자주 일어나지만 요즘은 매일 차를 선택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선물을 받은 차(TEA)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물로 받은 차 세트는 12개의 작은 상자 안에 1회 분량의 블랜딩 티가 들어 있는데 차의 이름을 정말 잘 지었습니다. 정말 매력적인 이름을 가졌어요. 라이크 카멜리아진저허그, 나이트 오브 곶자왈, 서귀오름, 에너지 베리, 클로드 모네, 미스로즈 등 블랜딩 티의 이름만 읽어도 설렘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몇 개월을 아껴두었다가 커피를 끊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요즘에서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아껴두고 싶은 마음 대신 어떤 재료들이 들어있을까, 기대를 하며 포장을 뜯고 있습니다.  

  

차, 차! @무지개인간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집 (사)춘기 학생이 차 맛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침의 기온 치고는 쌀쌀한 기운이 있던 날, 아침 식사 전 내주었는데 그날 이후에 춘기 학생은 차 마니아가 되었습니다. 아, 다행히 아직은 tea mania입니다. 아침마다 차를 내리며 유치원 때 다도를 배운 춘기 학생이 스무 살이 되어 이 어미에게 차를 대접해 주는 상상을 합니다.  정작 춘기 학생은 스무 살이 되면 운전면허증부터 따서 car mania가 될 상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우리 집 춘기와 같이 할 수 있는 게 또 하나 늘었구나,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차를 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선물로 받은 차이기 때문입니다. 제주에 살다 지금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언니는 이 차 세트를 선물로 주면 특별한 주문을 걸어주었습니다.


한 달에 하나씩, 12개를 다 마시면 용기가 날 거야!

  

  언니가 주문을 골고루 정성껏 발라준 덕분에 케이스만 가지고 있어도 용기가 흘러넘쳤지요. 1년 8개월을 케이스만 보며 용기 충전을 한 탓에 요즘은 1일 1차로 마음속부터 용기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용기 덕분에 매일 글감이 넘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매일 아침 차를 내리며 응원해 준 언니의 마음도 함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선물 세트를 받은 사람은 여럿이겠지만 저처럼 특별한 의미를 받은 사람은 세상에 하나뿐일 겁니다.


  이 차 세트를 선물 받고 1년 8개월 동안 이 차를 마시지 못한 이유는 바로 장비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티백만 마실 줄 아는 차계의 영유아였습니다. 그런데 선물을 받은 다음 날, 당장 용기가 필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용기를 내야 해!'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담고 심사숙고해서 고른 차를 하나 뜯었습니다.

  '종이가 왜 이렇게 안 뜯기지?'

  보통 때 먹어 본 현미녹차티백은 잘 뜯기는데, 이것은 몇 번을 힘을 주어도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고급져서 그런가 봐.'

  이번에는 송곳니로 깨물고 뜯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림없지요. 결국 가위를 찾아 쉽게 해결했습니다. 안 되면 되게 하는 방법은 될 때까지 붙잡고 있기보다 얼른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것도 때로는 좋은 선택입니다. 열린 차 봉투 안에는 티백이 아니라 말린 찻잎이었습니다. 아무튼 뜨거운 물이 담긴 머그잔에 부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결국 둥둥 뜬 찻잎을 하나씩 건져내고, 후후 불어가며 용기가 블렌딩 된 차를 마셨습니다. 그래도 찻잎이 씹히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렇게라도 마셔야 되나 싶지만 꼭 용기가 필요한 날이었거든요. 그날 이후 이 선물세트는 반려 차가 되어 부엌에 살았고, 여전히 우리 집에는 다기가 생기기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장비발을 세우기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1년 8개월째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던 오월의 어느 아침, 반짝이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집에 있는 장비로 집에 있는 차를 마시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드디어 찾아낸 것입니다! 바로 드립커피를 내릴 때 쓰는 도구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죠.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코앞에 두고도 한참을 찾은 것은 사실 다기를 사고 싶은 마음을 버리느라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내열 유리로 된 커피 서버에 찻잎을 넣고 80도 정도의 물을 부어 2, 3분 정도 우립니다. 그리고 머그잔 위에 드리퍼를 올리고, 그 안에 커피 필터를 넣은 다음 차를 부어 걸러주었지요. 느낌적인 느낌이겠지만 필터에 걸렀더니 아주 깔끔한 차 한 잔이 나왔습니다. 딱 좋아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주어진 도구들로 오늘도 맛있는 차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궁금은 합니다. 육아든, 운동이든, 캠핑이든, 요리든 모두 '장비발'인데, 장비발이 그냥 장비발은 아니더라고요. 개중에는 없어도 그만인 장비들도 있지만 있으면 편리한 장비들도 있더라고요. 이제 막 차를 내려 마시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커피를 사랑하는 지금, 저에게 다기가 그런 '개중'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다기에 우린 차는 첫맛부터 다르... 겠죠?

  머그잔이 비어갈수록 장비 욕심이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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