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명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음... 다시 생각해 보니 4월까지는 없었는데, 역전세로 3억을 잃고 나니 '한 번뿐인 인생, 후회 없이 최고로 살아보자'라는 마음을 먹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목표가 하나 생긴 것 같긴 합니다. SNS에서 명품백을 하나 산다면 oo을 추천한다는 게시물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본 가방이 요즘 들어 계속 생각이 나네요. 바로 채널 비슷하게 생긴 그 C사이죠. 그렇다고 갖고 싶어 죽겠다거나 내가 저걸 꼭 사야지 하는 마음이 아니고 미술관에 있는 그림 같은 느낌입니다.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고, 떼어 가면 방범센서와 방범벨이 요란하게 울리는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은 가방입니다.
물론 명품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사용하지 않지만 L사의 가방이 옷장 한 구석에 처박혀 있기는 합니다. (객관적으로) 잘 벌었던 2009년쯤 산 가방인데 무거워서 손이 가지 않더라고요. 그 무렵에는 직업병인 손목터널증후군이 있어 이틀에 한 번씩 침을 맞으면서 일을 했던 때라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이든 집에서 쓰는 그릇이든 가벼운 게 손이 더 자주 갔어요. 그래서 L사의 장인이 만든 가방은 열 번의 외출을 끝내고 세속을 벗어나 10여 년의 은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죠.
아무튼 명품이 있어도 안 들고 다닌 경험과 다른 사람의 이목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성격, 먹는 게 남는 것이라(쓰고 가방은 나만의 행복이지만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은 모두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가치관의 삼위일체 조합으로 명품에는 일체의 관심도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택배 하나가 집으로 배달되어 왔습니다. H사에서 발송한 물건이었습니다.
'H? 주황색 박스?'
H사에서 물건을 구매한 적은 없었지만 제 이름과 주소가 맞았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언박싱을 했습니다. 명품이라는 이름에 맞게 혹시나 제품이 상하지는 않을까 여러 겹의 포장재가 검지 손가락만 한 상자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어요. 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정말 궁금했지만 튀어나오는 궁금증을 함께 들어있던 카드로 꾹 눌러버렸습니다.
무지개인간아, 며칠 동안 고민하며 고르고 골랐는데 이게 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항상 고마워. -HJ
주황색 상자에 빠져 촐싹 대던 마음이 카드를 읽다 보니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습니다. HJ언니가 보낸 선물이었습니다. 몇 해 전 언니가 암 수술로 입원을 했을 때 아이를 봐준 일이 있는데, 언니는 그걸 두고두고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를 낳고 보니 언니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척 고마운 일이라도 지나고 나면 삶에 덮여 버리는 경우가 많지요. 분갈이를 하듯 다시 꺼내 고맙다는 말로 덮어주는 언니의 섬세한 마음에 저는 늘 감동입니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말로 담백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이제는 저에게 고마운 마음 대신 도와줄 사람이 옆에 있는 언니의 인복과 건강하게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길 바란다는 말은 언니의 힘든 시간을 들추어낼까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서로의 연결된 마음이 전해주었기를 바랐지요. 그리고 저도 주어진 삶을 감사하게 살며 이 선물의 가치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HJ언니의 카드 편지 덕분에 더 매력적인 주황색 박스는 그날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선물을 받은 지 꽤 되었지만 카드를 읽고 주황색 박스는 구경만 한 채 더 이상 열어보진 않았습니다. 다만 언니가 oo이라고 이야기를 해주었기에 이 박스 안에는 oo이 있구나, 생각할 뿐입니다. 거실 진열장에 놓여 있기에 슬금슬금 시선이 가는 날에는 종이 가방을 꺼내서 주황색 박스만 매만져 보고 다시 넣어두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전히 저에게는 아직 과한 것 같습니다. 걸맞지 않은 것을 꺼내 쓰지도 못하고 버리게 될까 봐 1년 7개월을 참았습니다. 그러던 지난 금요일 밤, 한 주를 마무리하다 갑자기 이제는 완전히 언박싱하기로 했습니다. 이 물건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역전세로 엄청난 실패를 겪고도 중심을 잘 지켜냈으니 생각과 태도로 본다면 열어도 충분할 것 같았습니다.
박스 안에는 아주 예쁜 립밤이 들어있었습니다. 뚜껑 부분에 자석 처리가 되어 있어 여닫을 때마다 자석 맞닿는 소리가 납니다. (이 소리마저 사랑스럽습니다)
박스 안에는 파우치가 하나 들어있고, 파우치 안에는 립밤이 있었습니다. 1년 7개월의 시간, 뜯은 포장지만 해도 택배 박스, 종이가방, 연미색 박스, 주황색 박스, 파우치까지 5단계를 거쳐 드디어 에르메스 로지 립 인핸서 로즈 데테 30의 실물을 영접을 했습니다. 우유빛깔 뚜껑 상단에는 에르메스가 새겨진 금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립밤의 옆면에도 HERMES 음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마음을 먹고 상자를 열었지만 불쑥 올라오는 '나는 이 명품이 어울리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은 이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합니다. 그야말로 '자신 있다'와 '없다'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상태이지요. 그래서 얼른 입술에 발라버렸습니다. 낙장불입! 물러서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잘한다, 무지개인간아!
HJ언니가 고르고 골랐다더니 평소에도 제가 좋아하는 립 컬러였습니다. 립밤이라 진하지는 않지만 생기를 돌게 하는 은은한 발색이 참 예뻤습니다. 반짝이는 입술 틈으로 봉인되어 있던 언니의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언니도 저처럼 고맙다는 말 뒤에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두었습니다.
나는 항상 무지개인간, 네가 잘 되길 바라. 잘 될 운명!
덕분에 요즘 제 입술은 HJ언니의 마음과 매일 닿아있습니다. 언니가 건넨 고운 마음처럼 곱게 발리는 립밤, 저도 이 입술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말을 건넬 것입니다. 이래서 다들 명품을 갖고 싶어 하는군요. 역시 명품입니다.
안녕하세요. 다정한 독자님!
요즘은 1년이 넘게 묵혀둔 지인들의 선물을 하나씩 풀며 손과 마음으로 상자 안의 선물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삶에는 '때'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발행한 브런치북에는 낯선 실패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브런치북] 친절한 실패1 (brunch.co.kr)
최근에 꺼내 또 다른 1년이 넘게 묵혀둔 선물인 차 세트 이야기도 읽어보세요. 그 안에 담긴 용기를 함께 나눠 가지면 좋겠습니다.
차도 장비발 (brunch.co.kr)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글을 나눌 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