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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n 30. 2023

나는 아빠처럼 살 수 있을까?

쉬어가는 글 ②

  역전세로 3억을 잃은 이야기를 쓴 것은 아빠의 무뚝뚝하고 다정한 말 덕분이었습니다. 아빠는 최악은 피할 수 있겠구나, 희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손실로 역전세 사태를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는 딸의 상황을 지켜봐야 했지요. 안절부절 못 하셨을 뿐만 아니라 분명 밤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 대신 '항상 함께 있다'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셨지요. 지나고 나니 이제야 아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모든 일을 마무리한 날, 아빠는 말씀하셨습니다.


  "무지개인간아, 대단하다. 견뎌낸 마음이 참 대단하다. 네가 아니었으면 웬만한 사람은 못 견뎠다. 그래도 묵묵히 할 일을 해가며 침착하게 버텨낸 게 정말 대단하다. 아빠는 정말로, 정말로 고맙다."


  무뚝뚝한 아빠의 입에서 오랜만에 긴 문장들이 줄줄이 나왔고, 제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전화기 너머로는 분명 떨리는 목소리가 아빠에게 전해졌을 테지만 대단하다는 아빠의 말을 '진실(眞實)'로 만들어 드리려면 저도 대단한 척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덤덤하게 말했습니다.


   "아빠, 이제 다 지나갔어."


  사실은 부끄럽고 보여주기 싫은 사건이었습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실패한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아빠의 말처럼 이렇게 힘든 사람이 또 있겠구나, 먼저 버텨낸 내가 '먼저 힘들었던 사람'이 되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마음을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빠는 제가 특별히 대단하다고 했습니다. 아빠의 말만 마음에 품고 글을 쓰고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겪은 일이 글의 소재로만 본다면 자극적이라, '탓'을 하고 싶어지는 날 것의 감정들은 어느 정도 정화시켰습니다. 갓 잡은 활어회도 좋지만 부드럽고 감칠맛이 도는 숙성회 같은 글이 되도록 감정의 기준을 지키려 애를 썼습니다. 꽤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현재에 집중하며 살고 있지만 처음의 글을 고치고 다듬는 과정에서는 그날의 감정과 마주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좌절감과 괴로움에 흔들리면 앙금을 가라앉히는데 시간이 걸렸지요. 글을 싹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열흘 전에는 처음 적었던 '낯선' 실패 경험(인지 '날 선' 실패경험인지 모를 글)을 모아 <친절한 실패 1>을 엮어 마무리를 했습니다.

  이제는 극복할 수 있었던 나다운 모습들을 하나씩 꺼내며 결국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적어보며 <친절한 실패 1>을 쓰며 지친 제 마음을 마주해 보려고 합니다.


  어렸을 적에 저는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학창 시절 사회와 가정 과목에서 배우는 '가부장적인'은 우리 아빠를 꾸미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부모님과 삶의 공간과 분리가 된 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빠가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인 부분이 특별히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금 제 나이쯤이었던, 제가 어릴 적에 겪은 아빠는 성격이 급한 편이긴 했습니다. 가끔 냄비 뚜껑이 끓어오르듯 불같은 화를 내고는 했지요. 기억을 되짚어보면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쯤부터 아빠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좋은 남편이 먼저 되기로 했고 아버지 학교를 다니면 노력하셨어요.  


  그래도 저는 서른이 되어서도 아빠를 닮았다는 말보다 엄마를 닮았다는 말이 더 좋았습니다.

  엄마는 무척 부드럽고 인내심이 많았습니다. 말이 많기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고, 비난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었지요. 그런 엄마의 뒤에는 항상 아빠가 계셨습니다. 아빠는 지금도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는 꼭 엄마를 가장 높여 줍니다. 저녁 밥상에는 모든 것이 지혜로운 엄마 덕분이라는 말이 후식으로 꼭 나옵니다.


  그러던 아빠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낀 일이 있었습니다.

  한평생을 공무원으로 사셨던 아빠는 퇴직 후 인도네시아 봉사활동을 떠나셨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기후도 맞지 않는 그곳에서 2년을 보내고 오셨습니다. 귀국을 열흘 앞두고 풀어진 긴장 탓인지 고열로 병원에 입원을 했지만 딱 맞춰 회복을 한 덕에 무사히 귀국한 일도 아빠의 정신력이 만든 결과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일도 있었네요. 아빠는 뼈만 남은 상태로 귀국을 하셨고 나중에는 걷고, 서는 것조차 힘들어하셨습니다. 아빠의 추측으로는 열병을 앓은 이후 근손실이 발생해서 그렇다는데 여하튼 어떻게 집으로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밀 검사 결과 다행히 이상은 없었고 고기를 열심히 드시며 근육을 키워 요즘은 날아다니십니다.


  아빠가 대단하다고 느낀 일은 또 있어요. 

  어느 날 아빠가 자전거를 타러 제주도로 오셨지요. 하루는 제주 서쪽으로 반 바퀴, 그다음 날은 그 반에서 동쪽으로 반 바퀴, 이틀 동안 자전거로 제주 일주를 계획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비 예보가 있었어요.

  "아빠, 5시부터 비가 올 것 같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면 좋겠어."

  "내가 위험할 것 같으면 안 하지. 걱정 마라. 지금 송악산 있는 데 다 와간다."

  결국 아빠는 그날 목표로 했던 강정에 도착해서야 전화를 했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앞이 안 보인다. 데리러 오너라."

  바쁜 와이퍼 소리를 들으며 5.16 도로를 타고 강정으로 아빠를 만나러 가는 길, 엄마와 통화하면서는 나이가 들어도 고집이 여전하네,라고 말했지만 목표가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했을 아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빠처럼 살 수 있을까요?

  요 근래에는 이런 생각이 자주 듭니다. 아빠는 책임감 있는 분이셨습니다. 단 한 번도 공무원 월급으로 삼 남매를 키우는 일이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고 보니 그건 정말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아빠는 자신을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일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주말에는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는 했습니다. 노트를 꺼내 시를 쓰고는 아빠의 마음에 들든 말든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읽어봐라. 시가 되나?"

  대체적으로 좋다고 피드백을 준 덕일까요, 아빠는 요즘도 시를 쓰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아빠의 수필을 더 좋아합니다. 언제가 아빠의 수필을 브런치에서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빠는 매 순간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할머니, 아빠의 사랑하는 엄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날에도 오래 사셨고 잘 사시다가 괴롭지 않게 돌아가셔서 감사하다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아빠가 얼마나 할머니를 사랑하고 사랑받길 원했는지 알기에 저는 그저 모든 일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구나,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아빠의 삶을 반이라도 닮을 수 있을까요?

  엄마가 되고 보니 자식에 대한 욕심이 납니다. 모든 부분에서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욕심이 아니라 저보다는 더 넓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존재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아이에게 더 선명하고, 넓은 세상을 열어주는 안경 같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을 이제 알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빠와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세상을 대하는 방법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분이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무뚝뚝한 딸은 아침에 아이들을 시켜 할아버지께 전화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애교가 많은 아들들입니다. 통화의 끝에는 늘 "할아버지, 사랑해요."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도 사랑해요."하고 응답이 오지요. 듣고 있던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하는 아빠였잖아.'




  호우가 내리는 제주의 아침에 아빠 생각을 꺼내보았습니다. 아빠가 보내주신 사진과 함께요.

  아빠가 다시 대단하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네요.

  우리는 모두 부모님께 대단한 자녀들이지요. 세상이 가끔 몰라주더라도 말이죠.


  [브런치북] 친절한 실패1 (brunch.co.kr)  

   저도 다시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읽으며 경험을 나눠주시고, 도움을 청하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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