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어가 사라질 무렵
아이를 낳고 키우며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은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집 둘째 아이는 받침이 다 들어간 자신의 이름이 어려웠는지 "다니!"라며 "다니가 모 해또.", "다니도 갈래." 이렇게 귀엽게 이야기하고는 했어요. 통통한 작은 입술 사이로 예쁘고 귀여운 단어들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아이들의 상상력에 깜짝 놀라며 '우리 아이 천재인가?' 착각하는 시기이기도 하죠. (저도 두 번이나 속았지 뭐예요?)
길을 걷다 문득 아이가 '애기' 때 알려 준 애기어가 생각이 나면 입꼬리가 저절로 씩 올라가요. 그래서 영원히 기억의 저 편으로 넘어가기 전, 생각이 날 때마다 정리해 보려고 해요.
※ 생각이 날 때마다 내용이 추가됩니다!
ㄴ
나쁜젤: 라푼젤
유치원 하원 버스에서 내린 여섯 살 초육이가 말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집에 오더니 큰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듯 귓 가에 대고 속삭이더라고요.
"엄마, 우리 유치원에 나쁜 젤이 있어."
이 날은 어린이 날을 맞이해서 동화 속 인물로 분장을 하고 축제를 즐기는 날이었거든요.
"나쁜 젤? 어떻게 생겼어?"
"이서영이 머리를 한쪽으로만 길게 해서 드레스를 입고 왔는데, 이름이 '나쁜' 젤 이래."
아유, 귀여워라 하며 '라푼젤'에 대해 알려주었지만 그동안 남자아이라는 이유로 공주 동화책을 너무 안 읽어주었구나, 아차! 하며 깨달은 순간이었지요. 그다음 날 초육이가 등원 버스를 타고 떠난 뒤 저는 도서관으로 가서 라푼젤과 그의 친구 공주들을 잔뜩 모셔 왔어요.
ㅁ
미국국: 미역국
초육이가 어렸을 때는 책을 많이 읽어 줬어요. 워킹맘이라 퇴근하면 저녁도 굶고 옷 갈아입는 것도 미룬 채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2시간이든, 3시간이든 계속 책을 읽어주었어요. 덕분에 초육이는 말이 빠르고 많은 편이었어요. 첫 생일이 지나고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예쁜 말들을 온 집 안에, 아파트 단지에 뿌리던지요. 가족 중 누군가의 생일을 맞아 친정엄마가 쇠고기 듬뿍, 들깨가루를 한 움큼 넣은 구수한 미역국을 끓여주셨어요.
"함, 모야?" (할머니, 이것은 뭐예요?)
"미역, 국."
"미국국?"
우리는 생일 때마다 미국국을 맛있게 먹었답니다.
ㅂ
뻐찌: 버스
미국국이 생일을 맞이했을 때 뻐찌도 태어났어요. 로보카 폴리를 엄청나게 좋아했던 초육이는 날마다 산책을 다니며 뻐찌, 택시, 뿡뿡을 찾아다녔어요. 버스라는 보드라운 발음 대신 경상도에서 자란 우리 초육이는 강하고, 또렷하게 '뻐찌'라고 힘주어 말해 줍니다.
"뻐찌가 뿡뿡!"
뽀요료: 뽀로로 (이음동의어: 뽀료료, 뽈롱로, 뽈롤로)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뽀로로의 인기는 정말 하늘을 찌르고 우주까지 날아올랐어요. 어느 정도냐면 말이죠, 집 앞 공원에 나가면 집집마다 사는 뽀로로들이 산책을 나왔어요. 아이들의 작은 손에는 뽀로로 비타민 캔디, 뽀로로 인형이 쥐여 있었고 엄마가 입에 쏙 넣어주는 뽀로로 치즈를 간식으로 먹으며 뽀로로 자전거나 뽀로로 킥보드를 타고 공원을 다녔거든요. 그러다 잠이 와서 울면 유모차에 앉아 뽀로로 영상을 보며 스르륵 잠이 듭니다. 그야말로 뽀로로는 그 시절 어린이들의 대통령, 뽀통령이었어요.
ㅊ
촌: 삼촌
저는 막내 동생과 8살 차이가 나요. 그래서 초육이가 태어났을 때 막내 동생은 군 복무 중이었어요. 휴가 나온 삼촌은 쉴 틈 없이 종알거리는 조카가 얼마나 귀여웠을까요? 조카도 최선을 다해 삼촌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촌, 촌, 촌..." 졸졸 따라다니면 촌을 부르는 아이는 촌(시골)에 가서 놀고 싶은 게 아니라 삼촌을 찾고 있었어요.
ㅎ
할: 할아버지
함: 할머니
말문이 막 트이기 시작한 두 살 무렵 초육이는 함께 살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호칭이 어려우니 이렇게 구별해서 부르더라고요. 배우지도 않은 자음을 이해하는 것 같은 초육이의 구분법에 저는 정말 천재를 낳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만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아이를 키워주신 친정 엄마도 '천재 아니냐'며... 다들 이렇게 키우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