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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Dec 08. 2023

슬픈데 아름다워서 눈물이 흐르죠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 책 속에 나오는 문장을 옮긴 것은 복숭아색처럼 보이는 산호색으로 표시했습니다.




  지난달에는 에밀 아자르의 장편소설 <자기 앞의 생>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에 발행한 '제 소원은 곱게 늙는 게 아닙니다 (brunch.co.kr)'에서 쓴 김영철 작가의 <울다가 웃었다> 북토크에 갔다가 그에게 추천받은 책 중 하나입니다. 추천을 받는 족족 책을 사재기부터 했더니 2~3년에 한 번은 아까운 마음으로 책장을 정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장르는 맞는지 정도는 찾아보는 편인데 김영철 작가님께서 그토록 깊은 감동을 받은 얼굴로 추천을 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주 읽고 싶어 미치겠는 마음이 폭풍처럼 몰려와 얼른 데려왔습니다.

  ♬ 우리 집으로 가자~

  

  <자기 앞의 생>의 프랑스어 원제목은 <La Vie devant soi>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앞으로의 남은 삶'이라고 번역됩니다. 에밀 아자르는 61세인 1975년에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하고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수상했습니다. 책 속의 주인공인 10살(알고 보니 14살이었어요) 소년 모모는 파리 빈민가에서 로자 아주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모모에게 로자 아주머니는 그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돌봐주는 고마운 사람이자 그들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끈끈한 유대감은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이어집니다.


  이 소설이 마음에 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있을 법한 일을 소재로 삼은 게 아니라 신문 기사에서 본 적이 있는 일이 책의 결말 부분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에밀 아자르가 집필할 당시에도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50년쯤 지난 오늘날에는 대중 매체를 통해 일 년에 한두 번씩 접하는 기사를 마지막 상황에 놓으면서 책과 현실의 간극이 사라지며 더 깊이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그동안 믿고 싶지 않은 안타까운 소식을 기사로 읽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도대체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던 저에게 <자기 앞의 생>은 일어난 일보다 더 중요한,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랑의 본질을 깨우쳐 줍니다.


  자기 앞의 생만큼은 자신의 굳은 의지대로 살 권리(혹은 죽을 권리)를 선택한 로자 아주머니와 그녀의 선택을 지켜주는 모모. 모모는 그녀와 친구가 돼주려고 옆에 매트를 깔고 눕기도 하고, 그녀를 위해 루주를 발라주고 볼터치를 해주고 눈썹도 그려줍니다. 그녀의 삶이 꺼지지 않도록 촛불이 꺼지면 다시 불을 붙이고 또 붙여주며 그녀의 볼에 뽀뽀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정신을 정돈하는데 가장 효과가 있었던 유일한 물건인 히틀러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모모와 로자 아주머니가 있는 '유태인 동굴'에 사람들에게 찾아왔을 때, 모모는 세상의 지혜를 들려주던 겉으로는 보잘것없이 초라해 보여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치가 있는 하밀 할아버지께서 (모모의 말을 빌리자면) 노망이 들기 전에,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한 말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사랑해야 한다.'는 마지막 문장을 남기고 끝이 납니다.

  

  사실 저에게 '사랑해야 한다'라고 일러준 작가, 에밀 아자르는 창조된 인물입니다. 에밀 아자르는 1956년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받은 로맹 가리(Romain gary)의 또 다른 필명이었습니다. 당시 로맹 가리는 프랑스 문학계의 스타가 되었지만 유명세와 함께 평론가들의 극심한 비판을 받아 괴로워했습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로맹 가리는 모험을 선택한 듯합니다.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하고, 한번 수상한 작가에게는 수여하지 않는 공쿠르 상을 다시 받게 되지요. 이때 로맹 가리는 오촌 조카인 폴 파블로비치를 내세워 수상을 거절하지만 당시 공쿠르 아카데미 의장인 에르베 바쟁은  '작가가 아니라 한 권의 책에게 투표한 것이며 탄생과 죽음이 그렇듯, 공쿠르 상은 수락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것이다.'라고 답변을 하며 에밀 아자르에게 상을 줍니다.


  이후 62세인 1976년,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가면의 생>을 발표하고, 1977년에는 본명으로 <여자의 빛>과 <영혼의 짐>을 발표합니다. 본명으로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비평가들은 "조카 에밀 아자르를 표절하려 든다"며 여전히 혹평을 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이중생활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활발한 집필 활동을 펼치던 로맹 가리는 1980년 12월 2일 오후, 입안에 권총을 넣고 방아쇠를 당겨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그의 유서에 따라 로맹 가리가 죽은 지 6개월 후에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을 통해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 자신이었음을 밝힙니다.


내가 얼마나 통쾌했을지 상상해 보시라.
나의 작가 인생 전체에서 가장 달콤한 즐거움이었다.


  많은 분들이 인생 책으로 꼽는 이유를 충분히 공감할 만큼 좋은 책이었습니다. 독서를 통해 내면에서 인간의 한계, 책 내용 그 자체, 책 속 문장 등 여러 갈래에서 질문들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문학의 매력을 <자기 앞의 생>을 통해 알게 된 것도 참 기쁩니다. 요즘 제가 가진 고민들이 인생과 사랑을 이해하게 되는 나이가 되면 어떻게 이해되고 풀어질지 기대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번 글에서도 책에 나오는 문장 하나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내용이 너무나 길어져서 두 편으로 나누어 기록하려고 합니다.


  짧게 작가와 책에 관한 감상을 덧붙이자면 작가 로맹 가리를 떠올리면 한 분야에서 경지에 도달한 그가 명예와 비평을 동시에 받으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애썼을 시간과 노력 그리고 괴로움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로맹 가리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문학 작품이었고, 그의 마지막 선택도 일종의 행위 예술처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작품 자체로 본다면 살아있다는 그 자체, 저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과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있다는 별 거 아닌 사실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문장처럼 책을 덮는 순간, 특별하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고 감사하게 됩니다. 결국 이토록 슬픈 이야기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모순, 그래서 제게도 인생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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