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마켓 거래기
한 때 내 별명은 당근이었다. 물론 아직도 이름 대신 당근이라고 불러주는 친구가 가끔 있다.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친한 친구들끼리 우리도 -그때 연예인들이 TV에서 그렇게 놀았다- '야채파'를 만들자고 해서 너는 얼굴이 조금 길쭉하니 고구마, 너는 고구마는 친하니 감자, 너도 까도 까도 매력이 있으니 양파, 머리가 뽀글뽀글하니 브로콜리, 너는 왠지 마늘처럼 생겼으니 마늘, 음...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으니 너는 생강. 이렇게 30초 만에 뚝딱 갖다 붙인 식재료가 우리의 별명이 되었다. 나는 윗 앞니 두 개가 커서 토끼 같아 보일 때가 있어서 당근, 그래서 나는 당근이 되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나니 당근은 아주 유명해지고 있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친구의 휴대폰에서 "당근!"이라고 귀여운 토끼(?)가 말했다.
"귀엽네. 이거 뭐야?"
"이거 중고장터처럼 안 쓰는 물건 사고파는 어플이야. 버리는 것보다 필요한 사람한테 팔면 좋잖아."
친구는 어느 순간부터 TV도 안 보고, 기계와도 거리를 두고 살면서 중고나라만 알던 내게 중고물품을 사고팔며 때로는 무료로 나누는 거래 어플이 생겼다고 알려주었다. 새로운 것이로구나. 하지만 어플을 깔지는 않았다. 있다는 것만 알면 되었으니까.
다시 당근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4년이 흐른,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제주로 이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1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물건을 팔기로 했다. 그중 하나는 네스프레소 머신. 고가의 기계였지만 고압으로 추출하는 진한 커피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맛이 아니었다. 그래도 손님이 오면 즐거운 홈카페를 만들어주는 고마운 기계였지만 코로나가 터지고 일도 바빠지면서 커피 캡슐과 머신에 먼지만 소복하게 되었다. 음, 앞에 쓴 세 줄은 조금 핑계처럼 보이고 결정적으로는 꼴도 보기 싫은 물건이라서 얼른 팔아치우고 싶었다.
네스프레소 시티즈, 3만 원.
회원가입을 하고 동네 인증을 한 뒤 이미 당근 마켓을 아주 잘 활용 중인 경력자들에게 두근두근 첫 판매글을 단톡에 보냈다.
'조금 더 길게 써봐.' -길게? 뭐라고 써야 하지?
'3만 원 너무 싼 거 아니야?' -나는 그저 빨리 팔고 치우려고.
경력자들의 눈에는 부족함 투성이었지만 나의 바람대로 거래는 빨리, 에누리 없는 '쿨 거래'로 마무리되었다. 너무 쌌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게는 기다리며 가격 협상을 할 여유가 없었으므로. 단지 빨리 팔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거래는 돈을 벌었다는 행운도 나눴다는 행복도 느낄 수 없었던,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잘 잊어버리는 성격이지만 자꾸 곱씹게 되는 어설픈 판매 실력이 마음을 산란하게 했고, 결국 탈퇴를 하고 말았다.
치유의 시간은 2년이 걸렸다. 타운하우스에 살며 주말에는 아이에게 자전거 가르쳐주는 친절한 무지개인간씨를 상상하며, 언제 가는 가족이 함께 해안도로를 달릴 거라고 기대하며 산 삼천리 자전거를 팔기 위해서였다. 타운하우스를 떠나며 구입한 지 1년이 되었지만 단 10분을 달려 본 자전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당근 마켓에 내놓기로 했다. 이번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 더 씩씩하고 용기 있는 마음으로 어플에 접속했다. 이만저만한 사연을 적고, 실제로 자전거를 탄 시간을 적었다. 곧 나를 고달프게 한 가격 책정의 시간이 왔다.
현재 새 상품의 판매 가격은 185,000원
구입 시기는 1년 전, 실 사용 시간은 10분. 그것도 타운하우스 내에서만.
그래서 적당한 중고 판매 가격은?
나에게는 필요 없는 상품이지만 필요한 사람이 잘 타 준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겠고 이왕이면 싼 가격에 팔고 싶은 마음이 다시 마그마처럼 끓었다. 기억 회로를 돌려 네소프레소 판매기를 떠올렸다. 그래, 에라! 모르겠다. 나는 14만 원은 받아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14만 원으로 가격을 적고 판매글을 작성했다. 첫 이틀은 아무도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이틀 후 사고 싶다는 채팅이 왔다.
상대방: 사려고 하는데 10만 원에 될까요?
'이왕 팔 건데 그냥 팔아버려?' 가을바람에 스르륵 날리는 낙엽만큼이나 쉽게 마음이 흔들렸다.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다.'와 '싼 가격에 사면 좋잖아.'라는 생각은 내가 하지만 나는 없는 그런 마음. 갑자기 나 자신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다.
나: 10만 원에는 곤란합니다. 죄송합니다.
상대방: 에누리가 안 되는 건가요?
나: 4만 원이면 거의 30%입니다. 에누리 수준이 아는 것 같아요.
이게 나라니... 솔직히 말하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거절, 잘하고 싶지만 어려운 그 거절을 잘 해낸 것 같아 뿌듯했다. 어차피 필요 없는 물건을 돈을 받고 판다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아싸! 하는 득템의 기회를 꼭 줘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 손해 봐도, 조금 불편해도 참고 살아야 된다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있는 나의 변화가 뿌듯했다. 이제 당근에 여유도 생기고 자신감도 붙었다.
결국 자전거는 주인을 만났다. 제주 동쪽 구좌에 살고 있는 6학년 남자아이였다. 만나기로 한 주말에는 가을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는 멜랑꼴리한 날씨였고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이곳으로 오는 데는 1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기에 1만 원을 깎아 드렸다. 그리고 이제야 당근이 주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내 아이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주지 못했지만 자전거를 잘 타는 6학년 아이는 신나게 동네를 누비면 좋겠다.
아이의 두 다리가 되어 줄 자전거야, 아이가 다치지 않게 잘 지켜주고 균형 잘 잡으며 부지런히 바퀴를 돌려주렴.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답니다. 당근으로 만난 이웃님도 짧은 만남이지만 좋은 분으로 남았어요.
따뜻한 제주의 이웃 이야기는 삶을 정성껏 (brunch.co.kr) 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