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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Oct 31. 2022

슬픔을 위하여

나에게 전하는 위로

  내가 슬픔을 극복하는 방식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요동 치는 감정 사이에서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끌어줄 거야.'라는 잔잔한 물결 하나를 찾으면 상황을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감정이 고요해지면 그 일이 나를 어떻게 성숙시킬지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희망을 그리며 삶을 믿어보는 긍정일지도 모른다.


  주말 사이 몇 년 만에 느끼는 슬픔이 찾아왔다. 억지로 감정을 다독이며 이불을 덮어쓰고는 누웠지만 평소처럼 '그래도' 희망을 불러보는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눈물은 베개를 적셨고, 눈에도 가득 고였다. 어쩐지 오늘은 슬픔을 삼키는 법을 모르고 싶었다.  얼마 만에 흐르는 눈물인지, 속 시원히 울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실컷 울고 나니 다시 슬픈 감정 사이로 조금씩 따스한 온기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어난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펑펑 울던 내 모습은 불과 1분 전이라 해도 이미 과거의 시간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슬픔을 과거에 묻고 나니 화면이 바뀌듯 다시 떠오르는 빛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누군가는 슬픔을 숨기지 않는다. 한때 나는 그런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내가 저 사람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대부분은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들 많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무기력함을 느끼며 좌절하기도 했다. 다행히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때 그것을 해결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그저 내가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것을, 입장을 바꿔 생각하고 깨달았기 때문에 내 시간을 쏟는 일은 없어졌다. 다만 훗날을 생각하지 않고 흐르는 감정에 충실하게 주변과 나누는 사람들은 보면 '나는 슬픔까지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일까?'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과 슬픔까지도 나눠야 된다는 옳지 않은 생각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마음이 내키는 데까지만 나누는 것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감정을 나눈다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나를 투명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니까. 마음을 뒤집어 보여줄  있는 존재가 한 둘은 있고, 그들 덕분에 어쩌면 나는 내가 겪는 모든 일이 나를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준다고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주에 와서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이라서 크고 작은 어려움 속에서도 가장 좋은 선택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주의 자연이 품어주는 든든함 속에서, 하루를 기쁜 마음으로 마무리하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것은 나의 하루를 함께 해준 사람들이 보내 준 마음이 덕분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생각을 통해 나는 가정 안에 갇혀 있던 나의 시선을 고개를 들어 더 넓게 보기 시작했다. 조금 더 건강한 자아와 잊고 있던 꿈,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떠올리게 되었다.


  주말의 슬픔은 또 흘러갈 것이다. 나 역시 월요일 오후가 되면 출근을 하고 지난 금요일 저녁에 멈춰 놓았던 일들을 이어서 해야 한다. 그 사이에 나의 슬픔도 조금은 희석되며 흐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울며 마음을 풀어놓을 존재들이 있었고, 일은 시계를 더 빨리 앞으로 감아주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라는 주말 미사 시작 전 선물로 받은 노래의 가사처럼 앞으로 채워 갈 시간을 위한 성찰을 통해 보통의 일상을 찾아야겠다. 잘하고 있고, 충분하다는 다독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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