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전하는 위로
내가 슬픔을 극복하는 방식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요동 치는 감정 사이에서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끌어줄 거야.'라는 잔잔한 물결 하나를 찾으면 상황을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감정이 고요해지면 그 일이 나를 어떻게 성숙시킬지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희망을 그리며 삶을 믿어보는 긍정일지도 모른다.
주말 사이 몇 년 만에 느끼는 슬픔이 찾아왔다. 억지로 감정을 다독이며 이불을 덮어쓰고는 누웠지만 평소처럼 '그래도' 희망을 불러보는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눈물은 베개를 적셨고, 눈에도 가득 고였다. 어쩐지 오늘은 슬픔을 삼키는 법을 모르고 싶었다. 얼마 만에 흐르는 눈물인지, 속 시원히 울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실컷 울고 나니 다시 슬픈 감정 사이로 조금씩 따스한 온기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어난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펑펑 울던 내 모습은 불과 1분 전이라 해도 이미 과거의 시간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슬픔을 과거에 묻고 나니 화면이 바뀌듯 다시 떠오르는 빛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누군가는 슬픔을 숨기지 않는다. 한때 나는 그런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내가 저 사람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대부분은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들 많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무기력함을 느끼며 좌절하기도 했다. 다행히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때 그것을 해결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그저 내가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것을, 입장을 바꿔 생각하고 깨달았기 때문에 내 시간을 쏟는 일은 없어졌다. 다만 훗날을 생각하지 않고 흐르는 감정에 충실하게 주변과 나누는 사람들은 보면 '나는 슬픔까지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일까?'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과 슬픔까지도 나눠야 된다는 옳지 않은 생각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마음이 내키는 데까지만 나누는 것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감정을 나눈다는 게 꼭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나를 투명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니까. 마음을 뒤집어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가 한 둘은 있고, 그들 덕분에 어쩌면 나는 내가 겪는 모든 일이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준다고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주에 와서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이라서 크고 작은 어려움 속에서도 가장 좋은 선택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주의 자연이 품어주는 든든함 속에서, 하루를 기쁜 마음으로 마무리하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것은 나의 하루를 함께 해준 사람들이 보내 준 마음이 덕분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생각을 통해 나는 가정 안에 갇혀 있던 나의 시선을 고개를 들어 더 넓게 보기 시작했다. 조금 더 건강한 자아와 잊고 있던 꿈,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떠올리게 되었다.
주말의 슬픔은 또 흘러갈 것이다. 나 역시 월요일 오후가 되면 출근을 하고 지난 금요일 저녁에 멈춰 놓았던 일들을 이어서 해야 한다. 그 사이에 나의 슬픔도 조금은 희석되며 흐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울며 마음을 풀어놓을 존재들이 있었고, 일은 시계를 더 빨리 앞으로 감아주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라는 주말 미사 시작 전 선물로 받은 노래의 가사처럼 앞으로 채워 갈 시간을 위한 성찰을 통해 보통의 일상을 찾아야겠다. 잘하고 있고, 충분하다는 다독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