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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런 삶

민생회복지원금

by 혼란스러워


금요일 저녁 정신없이 한 주를 보내고 퇴근했다. 긴장을 풀고 잠시 쉬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고향에 사시는 어머니가 전화하셨다. “내일 올 수 있니?”, “내일..?” 계획에 없던 일이라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리며 반문했다. “상품권인가 뭔가 또 나왔는데 농협마트에선 못 쓴다고 하고 시장이나 식당 같은 데만 된다고 하니 와서 시장 나가서 사 먹기도 하고.. 옥수수도 익어서 따놨고..” 주말이니 내려오라는 말을 민생회복 지원금으로 받으은 상품권과 옥수수 얘기로 하시는 거다.


2주 전에 다녀와서 이번 주엔 조용히 쉴까 했는데 이렇게 또 전화를 하시니 마음이 흔들린다. 안 그래도 지난주에 고향 마을에 폭우가 내려 피해 입은 곳이 많아서 둘러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에 영 편하지 않던 참이었다. 토요일 아침 미리 예약해 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깎고 혼자 고향에 내려갔다. 주말이면 늘 도로가 내려가는 차로 가득했는데 너무 더운 탓인지 막히는 구간이 하나도 없었다. 음악을 크게 켜놓고 따라 부르며 드라이브를 즐겼다.


어머닌 마을 회관에 계셨다. 회관까지 가서 어머니를 태우고 집으로 왔다. 집에서 에어컨을 켜고 텔레비전을 본다. 엄마는 내가 듣건 안 듣건 동네 사람들 이야기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계속하신다. 혼자 사시니 자식들 오면 할 얘기가 늘 많다. 해가 약간 기울었을 무렵 밖으로 나와 삽을 들고 이곳저곳 둘러봤다. 지난번 폭우로 패인 곳이 한두 개 있어서 흙을 퍼다 메우고 꾹꾹 밟았다. 금세 땀이 흐른다. 가만히 있어도 더운 날인데 몸을 움직이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그래도 비가 많이 온 뒤에 이렇게 와서 둘러보고 나니 마음이 편해진다.


저녁 7시 해는 아직도 식을 줄 모르고 서쪽 산을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장롱 앞에 앉아 한참을 부스럭거리더니 봉투 하나를 들고 나오신다. 이번에 받은 상품권이란다. 민생회복 지원금으로 노인들에게 지역 상품권을 지급한 것이다. 부자가 된 표정으로 얼만지 세보라고 하신다. 세금 낭비니 뭐니 말도 많지만 어머니 같은 노인들에게 얼마나 단비 같은 지원금인가. 시원한 냉면 한 그릇 사주겠다고 나가자고 하신다. 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 밑에 몇 분의 어른들이 계신다. 차 유리를 내리고 인사를 한다. 논 밭에 조금씩 피해를 입은 분도 계신다. “비가 많이 와서 이렇게 피해를 보셔서 어떡해요.”.. “할 수 없지 뭐..”, “네. 그래도 다른 지역에 비해선 피해가 덜 하고 사람 안 다쳤으니 다행이지요..”, "맞아.." 이렇게 안부 인사를 하고 나니 마음이 아주 가벼워진다. 비 피해가 심한 고향 마을 뉴스에 마음이 조금 무거웠는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 주차장에 주차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향에 오면 종종 찾는 식당이다. 시골 식당이지만 규모가 제법 커서 단체 손님도 꽤 오고, 오랜만에 내려온 자녀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외식하러 많이 찾는 곳이다. 삼겹살이나 갈비, 제육볶음 등 고기류와 냉면 등을 먹을 수 있다. 오늘은 나 혼자 내려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둘이 왔다. 어머니는 물냉면, 난 비빔냉면을 주문했다. 갈비도 먹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고기는 생각 없다 하시고 1인분은 안된다기에 포기했다.


식당 주인은 조금 부족할 것 같으면 만두를 많이 추가하신다고 하면서 만두를 추천했다. 고기만두와 감자만두 중 감자만두를 같이 주문하고 조금 기다리니 시원한 냉면과 한입에 쏙 들어갈 만한 동그란 만두 한 접시가 나왔다. 냉면도 양이 적지 않아 보였다. 어머니는 냉면 다 못 먹는다며 조금 덜어 가라 하셨다. 두 젓가락쯤 덜어서 내 냉면 그릇에 담았다. 역시 이런 날씨엔 냉면만 한 게 없다.


배불리 먹고 집으로 오니 해가 지고 뜨거운 기운이 조금 식었다. 밭 어귀에 지난봄에 심어놓은 방울토마토가 익어서 몇 개 따서 씻어 먹었다. 건강한 맛이 씹힌다. 내일도 여전히 뜨겁다는 예보라도 하듯 저녁노을이 붉다. 민생회복지원금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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