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내가 명랑하고 밝은 사람인 줄 알았다.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는 그랬다. 사람들을 웃기기 좋아했고, 어느 자리에 가나 즐거웠다. 그래서인지 막연히 난 명랑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난 명랑하지 않았다. 별로 웃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웃기는 순간도 많이 줄었다. 명랑했던 내 모습을 떠올려 본다. 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나.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명랑하지만은 않은 나의 모습도 많이 보인다. 늘 두 가지 모습이 함께했다.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모두 갖고 살았다. 우리가 달의 한쪽 면만 보듯이 사람들은 나의 밝은 면만 봤을지도 모르겠다.
‘명랑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본다.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다’, ‘유쾌하고 활발하다’ 명랑하다를 떠올렸을 때 그냥 밝게 웃는 모습만을 생각했지 구체적인 말로 생각해 보진 않았다. 흐린데 없이 밝고 환한 게 명랑한 모습이었는데 난 밝고 환하긴 했으나 흐린데도 있었다. 다만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사람들과 모여서 유쾌하게 웃고 떠들다가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일찍 지쳤고, 그럴 때마다 얼른 집으로 와서 혼자만의 고독을 즐겨야 했다.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타고난 천성인지, 자라온 환경이 영향을 미친 것인지.
슬픔과 쓸쓸함, 외로움과 같이 흐린 모습을 연상케 하는 단어들과도 일찌감치 친해지기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명랑하다는 것은 내가 설정한 이상적인 모습이고 난 ‘명랑하지 않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에 와서 그걸 따지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내가 규정했던 나의 모습에 오류가 없었는지 짚어보는 건 의미가 있겠다. 어디선가, 언젠가 주워들은 말들로 적당히 날 단정 짓지는 않았는지 내가 스스로 나에게 붙인 말들을 하나하나 따져봐야겠다.
명랑한 나는 분명 존재했다. 흐린 모습을 가진 나와 함께 존재했다. 흐린 구름 같은 게 내 마음에 차오를 때면 명랑한 모습의 내가 힘을 발휘해 그 구름들을 밀어내곤 했다. 그렇게 내 내면의 투쟁이 이어져 온 것이 내 삶의 모습이다. 그땐 명랑한 내 모습이 힘이 좀 더 세서 흐릿한 구름이 대체로 밀렸는데, 세상과 싸우며 살다 보니 명랑한 내가 점차 힘을 잃어 흐릿한 구름이 이길 때가 많아졌다. 어느 한쪽이 월등히 우세하길 원하진 않는다. 그런 삶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으니까.
다만 양쪽이 비슷하거나 명랑한 내가 약간만이라도 힘이 세면 좋겠다. 오늘 오후 ‘단조롭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왜 그 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 삶의 모습이 단조롭다고 생각하니 좀 우울해졌다. 사전을 찾아보니 단조롭다는 것은 ‘단순하고 변화가 없어 새로운 느낌이 없다.’라는 말이다. 오늘은 단조롭다는 느낌이 좀 우세한 것 같다. 억지로 밀어내진 않겠다.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 단조로움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새로운 것을 찾아봐야지 어쩌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