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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돌이

나는 크림이로소이다 4

by 혼란스러워

어제는 그루밍을 좀 오래 했더니 혀가 빠질 것 같다. 털이 길어서 그루밍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일반 고양이가 20분이면 될 일을 난 제대로 하려면 한 시간 가까이해야 한다. 앞발을 굽혀 침을 잔뜩 묻힌 후 눈을 감고 이마부터 턱 까지 몇 번이고 닦아 낸다. 요염한 자세로 벽에 기대어 앉아서 겨드랑이나 배를 닦는다. 몸이 워낙 유연하니 얼굴만 빼면 몸 대부분에 내 혀가 닿는다.

강아지 백돌이가 틈만 나면 까불어 대는 바람에 요즘 내 몸 관리할 시간이 부족하다. 태어 난지 한 달 반 정도밖에 안 된 어린 녀석이 겁이 없다. 첫날은 나한테 겁먹어서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떨던 녀석이 내가 조금 긴장을 풀어줬더니 만난 지 이틀 만에 말을 트고 여차하면 달려들어 내 몸을 물어댄다. 우리 고양이 세계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로 어린 녀석과 싸우는 게 유치하니 귀엽게 봐주자.


성질 같아선 발톱 세워서 펀치를 한 방 날려서 얼굴에 세 줄 상처를 내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주인이 나를 고약한 놈으로 볼 것 같아서 차마 그러진 못하고 살짝 겁만 준다. 예를 들면 앞발로 녀석의 몸을 휘감고 머리통이나 몸통을 살짝 무는 시늉을 하거나 옆으로 누운 채 뒷발로 녀석을 걷어차는 식이다. 발을 쓰거나 물을 때 발톱이나 이빨로 상처를 입지 않게 조심하긴 한다.


오늘 아침에 녀석이 밥을 잔뜩 먹고 한숨 자고 나더니 기분이 좋은지 갑자기 이리저리 방방 뛰고 장난감을 물어 흔들고 발광을 하더니 갑자기 쉬고 있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평온한 나의 아침을 망쳐 버린 녀석에게 너무 화가 나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앞발로 목을 감고 머리통을 살짝 물었다. 녀석이 괴로운지 발버둥 친다. 이럴 땐 약한 척한다. 얄미운 녀석 주인이 귀여워한다고 나를 얕잡아 보고 까부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하나. 이 녀석이 덩치가 작고 내가 크다는 이유로 늘 내가 가해자 취급을 받는다.

녀석의 입을 쩍 벌리고 뒷발로 살려달라는 몸짓을 계속한다. 이때다 싶어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주어 녀석의 몸통을 들어서 반대편으로 내친다. 녀석이 핑크색 뱃살을 드러내고 팔과 다리는 사방으로 뻗은 채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지르며 반대편 바닥으로 나가떨어진다. ‘깨갱~’ 녀석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눈치를 보며 구석으로 가서 앞발로 턱을 받치고 눕는다. 지금 당장은 풀 죽은 척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나에게 달려들 것이다.


그렇다고 녀석이 늘 나에게 까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나에게 친한 척도 한다. 며칠 전엔 내가 누워서 살짝 졸고 있는데 녀석이 다가와 내 귀를 핥아 주었다. 녀석의 혀가 얇고 가늘어서 내 귀 구석구석을 핥아 주었다. 내 혀가 닿지 않는 부분을 녀석이 해결해 주니 그르릉 소리가 절로 났다. 잠시 눈을 감고 즐긴다. 귀와 이마와 목덜미를 골고루 핥아 주었다. 녀석이 앞발로 몸 구석구석 마사지도 해줬다. 잠시 긴장을 풀고 녀석에게 내 몸을 맡겼다.

왠지 녀석이 내 기분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 같다. 이 어린 녀석에게 내가 놀아나는 건가. 까불다가 아부했다가, 화나게 했다가 기분 좋게 했다가 하는 이 녀석의 이 기술은 어디서 배운 걸까. "아 백돌아 그래 거기 거기. 아 시원해 백돌아. 그르릉 그르릉." 녀석에게 내가 느끼는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내 몸의 이런 반응은 본능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이 녀석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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