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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팔자야

나는 크림이로소이다 3.

by 혼란스러워

내가 비록 나의 소중한 것을 잃어 남자 구실은 못하게 되었으나 새로운 주인 식구들과 행복하게 살리라 다짐한 것은 지난번에 만천하에 알렸으니 두말하진 않겠다. 인간들 마음대로 내 동의도 없이 내 거시기에 손댄 것도 용서하리라 마음먹었다. 무더운 여름에 시원하게 에어컨 켜주고, 편안한 잠자리와 맛있는 사료, 시원한 물까지 다 알아서 챙겨주니 이렇게 사는 삶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주말에 내 묘생 7개월 만에 복장 터지는 일이 또 생기고야 말았다. 토요일이라 모처럼 식구들과 신나게 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또 어딜 간다고 난리를 치더니 나 혼자 떼어 놓고 저희들끼리 시골에 간다고 짐을 싸들고 나가는 게 아닌가. 인간들은 부모와 떨어져 살다가도 수시로 가서 만나고 하룻밤 자고 오고 하는 일이 허다하니 그것 까진 뭐라 하지 않으련만 사건은 그다음 날 일요일 아침에 발생했다. 주인 식구가 시골에 가서 하루 자고 교회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해서 돌아온 것인데, 갈 때는 셋이 갔으나 올 때는 넷이 온 게 아니던가.



집 나간 서방이 몇 달 만에 멀쩡한 마누라 두고 작은 마누라랑 새끼를 달고 온들 이 보다 더 기가 막히겠는가. 어디서 데려왔는지 글쎄 내가 이 집에 올 때 혼수품처럼 딸려 온 케이지 안에서 뭔가를 꺼내는 데 자세히 보니 내 덩치의 반에 반도 안 되는 작은 강아지가 아니던가. 나 혼자로 족한 게 아니었나. 이 인간들이 내가 이 집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식구를 또 늘린단 말인가. 1년이라도 지났으면 말도 안 하겠구먼 내가 온 지 겨우 한 달 조금 지났는데 나 하나로 만족이 안된단 말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얘기를 들어 보니 시골 할머니 댁 근처 친척집에 친척 어른들이 키우던 작은 '시고르 자브종'이 어디서 애를 배고 와서는 새끼를 세 마리 낳았고, 나의 잘 난 주인 아들 녀석이 그 새끼를 보고는 귀엽다고 난리를 치며 데려가서 키우자고 졸라서 데려왔다는 것이다. 그 친척 어른들도 새끼를 다 키우기는 힘드니 선뜻 데려가라고 하셨고, 데려가는 김에 두 마리 데려가라고 했단다. 그나마 한 마리 데려 온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 태어난 지 한 달 밖에 안된 녀석이라는데 똥오줌이나 제대로 가릴는지. 팔자에 없던 강아지 육아도 해야 할 판이니 내 속이 안 터지겠는가.


쥐새끼 만한 것이 내 펀치 한방이면 저~짝으로 나가떨어질 것 같은 똥개가 낯설고 무서운지 바들바들 떨고 있는 꼴이라니. 참 꼴 사납구나. 슬쩍 다가가 내 주먹으로 톡톡 건드리니 고개를 돌리고 구석으로 숨고 있네.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녀석이구나. 이놈아 눈 깔어라. 앞으로 내 눈에 거슬리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 한 껏 털을 세우고 겁을 주니 낑낑대며 더 구석으로 숨는다. 자세히 보니 암놈이로구나. "오빠라고 불러라. 아.. 오빠가 아닌가." 아무튼 그냥 오빠라 부르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름은 크림이고 이 집에는 한 달 반 전에 왔으니 내가 너 보다 한참 고참이렸다.

"이 집서 편히 살고 싶으면 하루빨리 똥오줌 가려서 싸고, 주는 사료 잘 먹고 낮에는 잘 놀고 주인 식구들 잘 때는 너도 허튼짓 말고 처박혀 조용히 자야 한다. 그리고 거실 구석에 있는 자동 급식기에서 나오는 사료는 이 오빠 밥이니까 근처에 얼씬도 말고. 내가 귀가 좀 예민하니까 내 잘 때는 조용히 다니고. 알겠지. 캬~악 퉤옹~."


한참 교육을 시키고 나니 녀석이 쫄아 있는 꼴이 좀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여 좀 풀어 주기로 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으니 아무튼 뭐 주인 식구들 다 나가고 나 혼자 있을 땐 심심하기도 했으니 녀석이라도 있는 것이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도 들고, 다시 보니 쪼그만 한 것이 귀엽기도 해서 한동안 지켜보기로는 했다. 그런데 녀석 지금은 처음이니 저렇게 얌전한데 원래 강아지라는 것들이 조금 친해지면 와서 친한 척은 오지게 하고 물고 빨고 짖으며 까불어 대는 족속이라 어느 정도 거리는 유지해야지. 처음부터 너무 풀어주면 나중에 녀석 덩치 커지고 그러면 틀림없이 맞먹을라고 할 테니 적정 거리 유지가 관건이렸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며칠 굶은 것 마냥 속이 쓰린 것은 온 식구들 관심이 저 녀석 한테 쏠린 것과 무관치 않은 것인가. 난 고양이가 아닌가. 쿨하게. 도도하게. 모른 척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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