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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방을 쓰다

나는 크림이로소이다

by 혼란스러워

“난 작은 방에서 백돌이, 크림이랑 같이 잘게.” 며칠 전 아빠 집사가 가족들 앞에서 선언하듯 말을 꺼냈다. 예전부터 강아지나 고양이와 같이 자보고 싶었다고 했다. 엄마 집사가 우리를 안방에는 못 들어오게 했기 때문에 우리와 자려면 서재로 쓰는 작은방에서 자야 했다. 그렇게 우린 같은 방에서 자기 시작했다. 밤 열한 시 반쯤 집사가 작은 방에 이불을 깔고 누우면 얄미운 백돌이 녀석이 집사 옆에 자리를 잡는다. 백돌이 녀석이 그러는 꼴을 보면 성질이 난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 못 본 척하고 한 발짝 떨어져 내 전용 방석에 자리를 잡는다.


처음엔 6시 전에 배가 고파서 집사를 깨웠다. 내가 깨우지 않아도 백돌이 녀석이 집사를 물고 빨고 흔들어 깨웠다. 7시는 돼야 일어나던 집사는 무척 힘들어하면서도 일어나서 우리들에게 사료를 챙겨주고 화장실 청소까지 해줬다. 청소기로 거실과 방도 구석구석 청소했다. 그야말로 우리 집사가 달라졌다. 며칠 뒤부터 백돌이와 난 집사를 너무 일찍 깨우지는 말고 여섯 시 반쯤에 깨우자고 합의했다. 기상시간을 한 번에 한 시간 당기는 건 좀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배가 고프면 어쩌냐고 따지는 백돌이에게 밤에 집사를 졸라서 사료를 좀 더 먹고 자라고 일러뒀다.


집사는 우리 덕분에 부지런해졌다면서 좋아했다. 안 그래도 아침형 인간이 되고 싶었다며 앞으로도 쭉 일찍 일어나겠다고 했다. 집사는 청소까지 마무리하고 씻고 나와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다가 출근한다. 신발을 신을 때 내가 재빠르게 따라다가 현관문 앞에 선다. 동작이 좀 느린 백돌이는 집사가 거의 현관문에 다다라서야 나와서 날 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깡충깡충 뛰며 다가온다.


집사는 그런 우리를 보며 기분이 좋아져서는 자기를 배웅하는 건 너희들 밖에 없다고 하면서 우리 머리를 한 번씩 만져주고 간다. 그때 아들 집사는 씻고 나와서 밥을 먹는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들 집사는 아침 먹는 일부터 쉽지 않아 보인다. 아니 아침잠에서 깨어나는 것부터가 고역이다. 엄마 집사가 몇 번을 소리치며 깨워야 간신히 일어나고 밥도 어떤 날은 먹었다가 어떤 날은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냥 나가기도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들 집사가 우리와 같이 살게 되면서 점차 밝아지고 대화도 곧잘 한다는 점이다. 아빠 집사는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식을 하나 더 낳아서 기를 걸 그랬다고 했다. 그런 상황을 볼 때 우린 형제가 없어서 외로워하는 아들 집사를 위해 이 집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지금은 엄마와 아빠가 우리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백돌이가 오기 전 한 달간은 내가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지금은 백돌이 때문에 그 사랑이 좀 줄어든 것 같아서 수시로 질투가 난다. 그래도 집사들 다 나가고 나만 있으면 심심했는데 백돌이가 온 뒤로는 심심할 일은 없다. 오히려 녀석이 너무 귀찮게 해서 심심할 틈이 없다. 난 가끔 혼자 조용히 쉬고 싶은데 녀석은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장난을 건다. 특히 집사들이 있을 땐 더 발광한다. 집사들 없을 땐 그나마 얌전한 편이다. 기회주의자에 여우 같은 놈이다.


어젯밤에는 아빠 집사가 자기 전에 라면을 끓여 먹고 잤다. 밤늦게는 잘 먹지 않는 편인데 어젠 11시가 넘어서 갑자기 출출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밤에 자면서 방귀를 뀌어댔고, 속이 편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방귀 가스는 냄새가 아주 고약했다. 냄새를 잘 맡는 백돌이 녀석은 그런 줄도 모르고 집사 아랫배 근처에서 잘도 잤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냄새가 독해서 거실로 나갔더니 인공지능 공기청정기도 갑자기 빨간 불이 들어오더니 거세게 돌아갔다. 방귀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렇게 거실에 한참을 나와 있다가 다시 들어가니 냄새가 거의 빠져 있었다. 한 번 깨니 잠이 오지 않아 거의 뜬 눈으로 두 어 시간을 잡생각을 하며 누워 있었다. 좁은 공간에서 백돌이와 아빠 집사는 수시로 자세를 바꿔가며 곤하게 잤다. 가끔 아빠 집사가 자세를 바꿀 때 백돌이가 사이에 끼어서 깨갱 소리를 냈지만 둘 다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9월로 둘째 주가 되니 밤엔 제법 선선하다. 이제 에어컨을 켜지 않고 창문을 다 열어 놓고 잔다. 새벽엔 약간 추운 느낌이다. 아빠 집사가 배를 내놓고 이불도 덮지 않고 잔다. 방문을 앞발로 살짝 밀어 거의 닫히게 했다. 그리고 백돌이가 누워 있는 반대편으로 넘어가 집사 바로 옆에 웅크리고 누웠다. 비로소 조금 잘 수 있었다. 눈을 뜨니 백돌이가 집사를 깨우고 있었다. 나도 일어나 골골송을 부르며 집사에게 몸을 비볐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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