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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대이동

다음부턴 당신들만 다녀 오시오

by 혼란스러워

10월 달력엔 빨간색이 많았다. 아빠 집사는 한참 전부터 달력을 보며 연휴가 너무 길다고 푸념했다. 듣자 하니 연휴가 길다고 본인을 위해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추석 명절이라 처가와 본가를 다녀오면 시간이 다 가버릴 것이라고 했다.


엄마 집사 집과 아빠 집사 집 각각 이틀 밤씩 머물 계획을 잡았다. 엄마와 아빤 고양이인 나를 데리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고민 끝에 아무리 고양이라도 4일 밤은 너무 길다면서 백돌이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연휴 시작 전날 엄마 집사는 집을 싸면서 아들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다고 했다. 고양이와 강아지를 데려가야 하니 짐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다. 4박 5일을 떠돌다 돌아와야 하는 우리의 짐은 SUV차량 트렁크를 채우고 도 뒷자리 하나까지 점령했다.


강아지 백돌이 녀석은 평소 하던 대로 여우같이 아들 집사 품에 안겨 차에 올랐고 난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걱정과 함께 이동장에 갇혀 차에 올랐다. 오랜만에 집 밖에 나오니 시원한 느낌도 들어 한참 동안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이동장 안에서 실수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똥과 오줌을 한참 참은 끝에 목적지인 엄마 집사의 본가에 도착했다.


그들의 계획은 엄마 집사 본가에 먼저 가서 두 밤을 자고 아빠 집사 본가로 이동해서 두 밤을 잔다는 것이었다. 아파트가 아닌 시골집이었기에 나와 백돌이가 머물 공간은 별채라고 할 수 있는 작은 방이었다. 작지만 화장실도 있고, TV가 설치된 독립된 공간인어서 할머니 할아버지 눈치를 덜 보고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시간을 나 혼자 보내야 해서 심심했다.


심심할 때면 집사들을 불렀다. 그들이 무얼 하고 있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가 필요하면 불렀다. 그때마다 아들 집사가 오거나 엄마 아빠 둘 중 하나가 와서 나에게 밥을 부고 물을 주고, 화장실을 치워준 뒤 조금 놀아줬다.


고양이에게 평소 생활하던 공간을 떠나 다른 공간에 머문다는 건 상당한 스트레스를 줄 수 있는 상황이지만, 난 그런 것에 덜 민감한 편이라 금세 적응했다. 집사들이 날 버린 게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고 내가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와서 날 돌봐줬다. 그래서 그들을 믿고 즐기기로 했다.


이틀 뒤 우린 다시 차를 타고 아빠 집사 본가로 이동했다. 먼 거리는 아니었다. 같은 시에 속한 마을이었기에 금방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작은 방을 배정받았다. 나이가 많이 보이는 할머니가 나를 보고 날랐다. "무슨 고양이를 다 데리고 왔니. 개도 데리고 오고, 하이고 요새 사람들은 다들 개, 고양이 키운다더니 너희도 그렇구나." 혀를 끌끌 차시며 우리를 반겼지만, 난 썩 내켜하진 않아 하시는 느낌이었다.


할머닌 강아지는 그래도 좋아하셨지만 고양이는 싫다고 하셨다. 명절이라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개를 좋아하는 '개파'와 고양이를 좋아하는 '고양이파'로 나뉘었다. 그래도 내 외모에 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 만족했다. 내 온순한 성격과 있어 보이는 털결과 외모로 인해 난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비록 대부분의 시간을 작은 방에 갇혀 지내야 했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올 때마다 난 사람들에게 소개됐고 사람들은 날 한 번씩 안아보거나 쓰다듬어 보고는 좋아했다.


그렇게 긴 외유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몸을 실었다. 연휴 내내 비가 내리더니 가는 날까지 비가 내렸다. 밤이었고 난 또다시 이동장에 갇혀 차에 올랐다. 올라가는 길에는 왠지 이동장이 답답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난 계속 풀어달라고 소리쳤다. 아빠 집사는 운전을 하면서 "크림이 왜 그래? 어떻게 좀 해봐."라는 말을 계속했고, 엄마 집사는 "크림아~ 조금만 참아 차 안이라 어쩔 수 없어."라는 말로 날 달래려 했다. 하지만 난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었고, 밖을 내다보고 싶었다.


풀어준다고 해도 운전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이런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잠깐 풀어줘 보라는 아빠 집사의 말에 난 잠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동장 밖으로 나와 창밖을 보니 도로에 차들이 많았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는 느리게 전진했다. 운전대 쪽 내비게이션을 보니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도착하려면 두 시간 넘게 남아 있었다.


이렇게 뻔히 길이 막혀서 오래 걸릴 것을 예상하면서도 왜 그 시간에 나왔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인간들만의 사정이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오래 같이 있기는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떠나는 자식들을 보내며 서운해하셨지만 자식들은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차 안에서 그들은 "아~ 그래도 우리 집이 제일 편해, 이틀 밤을 자는 건 너무 힘들어."라고 했다. 인간들도 우리처럼 부모와 독립해서 사는 게 당연하고 편한 것일까.


엄마 집사는 다음부터 고양이는 데리고 다니지 말아야겠다고 했다. "누가 할 소릴. 우리 집이 제일 편한 건 고양이인 나도 마찬가지오. 다음부턴 당신들만 다녀 오시오. 난 혼자 있을 테오. 차 안에 갇혀 있는 것도 갑갑할 노릇인데 이동장안에 날 가둬놓고 뭐 하는 짓이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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