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크림이로소이다 2
"냐옹"
내가 이 집에 온 지 한 달이 넘어가는 이 시점에 이 이야기는 꼭 하고 넘어가야겠다. 이 집에 오고 일주일쯤 지난 어느 토요일에 주인 내외가 갑자기 날 케이지에 가두더니 차에 싣고 어디론가 향했다. 도착한 곳은 동물 병원이었다. 얼마 전에도 다녀왔는데 왜 날 또 데려왔는지 모르겠으나 의사가 내 팔다리를 벌리고는 무슨 사진을 찍고, 무시무시한 주삿바늘을 꼽아 피를 뽑았다. 사진을 찍으려면 내 매력을 뽐낼 비장의 자세가 많은데 왜 팔다리를 쭉 벌리고 배를 까놓고 찍느냔 말이다.
한참 후에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난 케이지에 있었고 주인 내외가 의사와 한참 이야기 하더니 돌아왔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주인 내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병원에 데려왔는데 크림이 염증 수치가 높아서 수술을 못한대요. 염증이 만성이라고 하고 백혈구 수치도 높다는데요. 아 검사결과지요? 네 사진으로 보내드릴게요.” 듣자 하니 펫샵 주인 내외와 통화한 것 같다. 내 검사 결과가 안 좋아서 수술을 못했다고? 무슨 수술을 말하는 건지.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이 집에 올 때 감기 기운이 좀 있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내 건강이 원래 안 좋은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삼일 후 난 펫샵으로 옮겨졌다. 자기들 협력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수술할 수 있으면 한 뒤 2주 정도 케어 하고 보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협력병원 의사가 내 검사결과지를 보고는 수술을 못할 정도는 아닌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 주 토요일에 다른 병원에 가서 수술대에 올랐다.
주사 바늘이 내 몸에 들어온 것이 느껴진 후 기억이 없다. 뭔가 따끔했는데 잠들었다. 깨어보니 내 아래쪽이 뭔가 허전했다. 알싸한 통증도 느껴진다. ‘인간들아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들이 내 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된 건 잠시 후 인간들 통화 내용을 듣고 나서였다. “안녕하세요. 크림이 중성화 수술 했어요. 수술 잘됐고요. 회복되면 데리고 가겠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중성화라니. 내가 고자란 말인가. 니들이 무슨 권리로.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 소중한 거시기를 니들 멋대로 제거한단 말이냐. 잊지 않겠다. 이 모욕감을.
그날 저녁 난 식음을 전폐했다. 밤새 꿈을 꿨다. 길거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고양이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예쁜 암컷이 보여 다가갔더니 냅다 도망쳤다. 수컷 고양이들이 내 뒤로 다가와 킁킁거리고는 하악질을 하며 화를 냈다. 그때 저 멀리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검은 턱을 가진 커다란 개가 침을 뚝뚝 흘리며 나를 향해 입을 벌렸다. 너무 무서워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급기야 그 녀석의 얼굴이 내 눈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난 소리를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거친 숨소리가 났다. 꿈이었다는 것에 안도하며 주위를 살폈다. 창살 안에 갇혀 있었다. 다른 고양이며 개들은 모두 자고 있다. 물그릇에 다가가 할짝할짝 물을 먹었다. 오늘 수술을 해서 기력이 없어서 그런지 개꿈을 다 꿨다. 안 되겠다 싶어 밥그릇으로 다가가 사료를 먹었다. 수술 때문에 어제부터 금식한 배가 쪼그라들어 등가죽에 붙을 지경이었다.
살아야 한다. 이런 몸으로라도 살아야 한다.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했다. 까짓것 결혼 안 하고 자식 안 낳고 나 혼자 행복하게 살면 된다. 적당히 인간들에게 맞춰가며 편하게 살자. 먹자. 살기 위해서 먹자. 배불리 먹고 나니 다시 잠이 쏟아졌다. 그렇게 며칠을 먹고 자니 몸이 회복됐다. 수술하고 일주일쯤 지나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왔다. 주인 부부와 아들은 날 전보다 더 반겼다. 난 엉덩이와 꼬리를 바짝 들어 올리고 그들에게 다가가 몸을 비비며 그르릉 거렸다. 주인아저씨가 내 궁둥이를 손으로 팡팡 두드렸다. 난 냅다 드러누워 배를 보여줬다. 주인 식구들의 손이 따듯했다. 발가락에 침을 묻혀 눈을 비볐다. 그들이 더 잘 보였다. 활짝 웃으며 나를 들여다보는 그들의 눈에 사랑이 느껴진다. 비록 내 남자의 구실은 못하게 되었으나 저들이 바라는 고양이는 되어 줄 수 있으리라. 나는 이 집에서 '크림이'로 살겠다.
"냐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