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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크림이로소이다

by 혼란스러워

내가 이 집에 온 건 한 달 전쯤이다. 다섯 인간 식구가 사는 집에서 사는 반려묘 엄마 아빠 사이에서 오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더 이상 그 집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주인 부부는 자기 아이들 셋 먹여 살리기도 힘든 데다 우리 엄마 아빠가 다섯 남매나 낳으니 귀여운 우리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좁은 공간과 식비며 병원비, 간식비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던 중 주인 부부는 누군가 나를 원한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난 좁은 케이지에 갇혀 낯선 젊은 부부에게 넘겨졌다. 그들 부부는 펫샵이라는 끔찍한 사업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었다. 다음 날 그들은 날 병원에 데려갔다 의사가 내 피를 뽑아 검사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난 이 집으로 왔다. 역시 좁은 케이지 안에 갇힌 채 차를 타고 30분쯤 이동하니 어느 아파트 단지 주차장이었고, 차에서 내리니 낯선 부부와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 귀엽다." 아이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그들은 거실에서 케이지 문을 열었다. 난 조심스럽게 나와서 구석구석 냄새를 맡았다. 사람들에 익숙해진 난 그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엄마! 얘는 하악질도 안 해" 아이가 말했다. '하악질? ㅎ 겁먹은 녀석들이 하는 거라고. 난 그딴 거 안 해. 당신들이 무섭지 않아.' 내가 하악질 안 해서 다들 안심하는 것 같았다.


아이가 손을 뻗어 내 등을 만진다. 순간 움찔했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인상 쓸 뻔했다. 본능적으로 하악질 할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그르릉 소릴 내줬더니 아이가 좋아한다. 엄마 아빠도 다행히라며 안심한다. 거실 창쪽을 보니 나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캣타워가 보인다. 전 집에 있던 것보단 작았지만 난 캣타워를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쪽엔 내 밥그릇과 물그릇이 있다. 밥그릇에 사료가 없다. '뭐야 배고픈데 밥도 안 주고.'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드르륵~'하고 뭔가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소리 난 쪽을 보니 방금 전까지 비워져 있던 그릇에 사료가 가득했다. 자세히 보니 그릇 위에 통이 있는데 그 통에 사료가 가득했다.

'아 자동 급식기구나.' 순간 주인아줌마가 말했다. "8시에 사료 나오도록 설정했는데 딱 맞게 나오네. 하루 세 번 나올 거야.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저녁 8시에 한 번." 뭔가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무작정 많이 먹어서 살찔까 봐 그렇게 한 것일 테니 좋게 봐주기로 했다. 그동안 먹던 사료보다 맛이 별로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주인 아들 녀석이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데 내가 이 사료를 먹으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감소한다나 뭐라나. 아 짜증 나. 지가 알레르기 있는데 내가 왜 맛없는 사료를 먹어야 해. 그래도 배고프니까 일단 먹는다. 먹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그래도 거실이 넓어서 운동하긴 좋겠다. 난 뭐 특별한 장난감 없어도 혼자 잘 노는 편이다. 바닥에 종이 조각 구겨진 게 보여서 앞발로 툭툭 치며 드리블을 좀 해봤다. 주인 인간들이 좋다고 난리다. "메시네 메시." 메시가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이 종이 뭉치를 발로 치는 행동을 보고 좋아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거실 한쪽에 갈색으로 생긴 커다란 원통형 물건이 있다. 그 옆에 가니 시원한 바람이 나온다. "얘 좀봐. 공기 청정기에서 바람 나오니까 시원한가 봐. 그나저나 청정기가 털을 좀 잘 빨아들여 주면 좋겠네. 비싼 게 주고 산 건데." 주인 아줌마 하는 말을 들으니 나 때문에 공기 청정기를 새로 산 모양이다. 얼마나 주고 샀길래 비싸게 주고 샀다는 건지 모르지만, 이래서 눈치 보여 살겠나. 나랑 살기로 했으면 그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털 안 빠지는 고양이도 있나. 아무튼 공기 청정기도 그다지 유쾌하진 않군.


피곤해서 소파 밑 거실 바닥에 앉아 잠시 쉬자니 잠이 쏟아졌다. 난 털이 좀 긴 편이라 요즘 같이 더운 날씨에 힘든데 그래도 에어컨을 시원하게 틀어 주니 그건 좋았다. 시원한 바람에 잠이 솔솔 온다. 그때 갑자기 코 끝에 뭔가 닿는다. 주인아저씨가 내 코에 자기 발가락을 가까이 댄다. '킁킁. 엣취.' 살짝 재채기 비슷하게 숨을 내뱉었다. 냄새가 별로다. 아무튼 인간들은 '인권'은 그렇게 중요시하면서 '묘권'은 개무시한다니까. '발가락 치워라. 주먹 날리기 전에.' 난 인간들이 '냥펀치'라고 부르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진짜 화나면 발톱을 꺼내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그렇지만 먹여 살려주는 인간들에겐 발톱을 꺼내지 않는 게 고양이계의 불문율이다.


여차하면 편치를 날릴 생각으로 발에 힘주고 있는데 주인아저씨의 발이 내 등을 살살 문지른다. '아니 손 놔두고 왜 발로 지랄이야. 그래 첫날이니 봐준다.' '그르릉 그르릉' 등에 닿는 촉감에 어쩔 수 없이 그르릉 소리가 났다. '아 아무 때나 그르릉 해주면 안 되는데.' 기분은 나쁜데 그르릉 소리가 난다. "얘봐 좋은 가봐. 그르릉 소리 낸다." 주인 인간들은 나와 생각보다 쉽게 친해졌다고 좋아하고 난리다. 분위기를 살펴보니 난 중학교 1학년인 이 집 아들이 원해서 이 집에 오게 됐다. 그 녀석이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서 날 선택했단다. 난 네바 마스커레이드 종인데 우리 종이 인간에게 알레르기를 덜 일으킨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인간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레르기가 심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래야 이 집에서 오래 잘 살 텐데. '아들아 노력해 보자.' 나도 사료 열심히 먹을 테니 너도 약 잘 챙겨 먹고, 엄마 아빠랑 청소 잘하고, 한 달에 한 번은 나 목욕시켜주고 털관리도 잘해줘. 목욕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어쩔 수 없지. 널 위해서라면. 어른들은 별로지만 너 같은 아이들은 좋아하니까. 아무튼 앞으로 잘해보자.' 난 잘해보자는 표시로 아들 녀석 다리에 몸을 비볐다. 아들은 알레르기 때문에 선뜻 만지지 못했지만 좋아했다.


"엄마. 근데 얘 이름은 뭐로 짓지.?"

"네가 지어 봐."

"음.. 크림이 어때? 털 색깔도 그렇고.."

"크림이?.. 좋은데? 크림으로 하자."

'앗. 내 이름은 쿠키였는데. 전에 살던 집에서 아이들이 지어준 이름 쿠키.'

이렇게 해서 난 쿠키에서 크림이 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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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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