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잊어버림의 사소함
비 맞아 피어나는 봄꽃도 예쁘지만, 비 맞아 질 준비를 하는 가을꽃은 왠지 애잔해서 더 예쁘다.
매년 이맘때쯤이 되면 걷다 보이는 꽃이 눈에 밟힌다. 자연물을 꺾어오는데 약간의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만, 그중 몇 송이는 누군가에게 기억될 테니 그것 또한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거야.라는 소심한 합리화를 하며 누가 볼세라 주위를 휙 한번 보고 대담하게 꺾어낸다.
오늘도 수확이 좀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점심 외식으로 중국집에 가서 먹어 본 중에 베스트 3위안에 드는 맛있는 쟁반짜장을 먹고 운전석에 들어가려는데, 오늘 추적추적 내린 비를 맞고도 파스텔 톤 노란빛을 생생히 내는 한 무더기 들꽃을 보았다.
짜장면 그릇을 앞에 두고 고픈 배에 침을 꼴깍하던 것처럼 눈에 힘이 들어갔다(누군가가 보았다면 번쩍임을 보았으리라).
나는 매년 가을 이런 식으로 꽃을 뜯어온다. 책갈피를 만들기도 하고, 지인들에게 줄 위즈덤 카드를 만들기도 한다. 지갑에 꽂아놓고 매일매일 보고 읽으면 그 말이 심령에 새겨져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카드.
이번 해에도 열명 남짓의 지인들에게 소중하게 마음에 품은 문구 하나 알려달라고 청했는데, 가을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산책을 나갈 틈이 없어 (이 대목에서 진짜 틈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는 데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과, 이 가을이 다 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노심초사하던 차에 중국집 주차장에서 발견한 금광이랄까.
행복은 소소한 곳에 있구나, 하며 기분 좋게 뭉텅이로 꺾어왔다. 중국집 주인장이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자연물 도둑질을 해서 부모님 가게에 도착해 엄마가 뺏어가신 (엄마는 꼭 내가 읽고 있는 중의 책을 잠시 빌려 보시다가, “어머 이거 너무 재미있잖아?” 하시며 아예 가져가시는 일이 많다. 그리고는 방치하신다는게 맹점이다.) 책 몇 권을 꺼내 꽃잎이 잘 펼쳐지도록 놓고 책장을 꾹 눌러 닫았다.
그리고는 엄마가 절대 눈치채지 못할, (엄마는 꼭 내 물건을 임의로 처리하고 내가 그것을 찾으면, 아주 후회하시는 액션을 취하시며 본인도 모른다고 하시는 일이 왕왕 있다) 그런 곳에 책 세 권을 꽁꽁 숨겨놓았다. 공구통을 위에 올려놓았으니 압력은 충분할 것이다. 생각하며 흐뭇하게 발돋움을 위해 썼던 의자 아래로 내려왔다. 이렇게 겨울을 기다리면 되겠지.
압화의 역사는 나름 오래되었다. 벌써 꽤 시절이 지난 옛날에 몽골에 갈 일이 있었다. 선교사님께서 구릉을 함께 걸으며, 지천에 핀 이 식물이 에델바이스라고. 에델바이스의 꽃말은 Endless Love라고 하시며 가리키신 풀을 몰래 잔뜩 뜯어서 성경 책 안에 숨겨서 인천공항을 통과하기까지 얼마나 졸았었는지 모른다.
식물 반입으로 공항에서 ‘나의’ 에델바이스 무더기를 빼앗기고 붙잡히는 참사를 당할지 모른다는 압박이 들었지만 나는 강경히 이 일을 단행했다. 이제와 고백하지만 아마도 공소시효는 끝났을 것이다. 나는 당당하다.
잘 말려서 코팅해놓았던 에델바이스 책갈피는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나에게는 한 개도 남지 않았지만, 나는 그때 만들었던 책갈피들의 모양새 하나하나 다 기억한다.
그저 시답지 않은 들꽃 한송이가 꽤 오래 나와, 우리와 함께하는 거, 그거 참 괜찮은 기분이다.
‘기억’이란 이름으로 코팅된 그 압화 물들이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해 주는 거. 그리고 어느 순간에 잃어버려 그런 게 내 곁에 있었지 하는 거. 기억하고, 또 잊어버리는 거. 그거 참 괜찮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