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구치 다카오 검찰관은 일곱 번에 걸쳐 안중근을 신문했어요. 일곱 번의 신문기간 동안 뤼순감옥의 낮과 밤은 서른 번씩 지나갔지요. 다카오는 처음 안중근을 신문했던 당시를 여전히 잊어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는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일본의 신문을 받게 된 것은 전쟁에 패배한 군인으로서 포로가 된 때문이라고 했어요.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행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해 줄 것 또한 요구했어요.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게 된 이유 열다섯 개 조항을 너무도 침착하게, 단호하게 말하던 그의 흐트러짐 없는 태도는 잊히지 않았던 것이죠. 조국의 대정치인을 절명시킨 적국의 살인범이었지만 그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와 언행은 그와 그의 조국만이 호소하고자 하는 의(義)를 분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했죠. 이 기묘한 생각은 미조구치 다카오뿐만이 아니었죠. 안중근을 감시, 경호하는 헌병 치바 도시찌도 마찬가지였어요. 반복되는 신문이 진행되는 동안 안중근이 보여준 것은 침착한 태도와 그리고 동양의 각 나라가 자주독립하는 동양의 평화에 대한 말이었지요.
- 일본이 한국을 멸망시키거나 병합하려고 해도 여러 나라가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려고 하는 야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가 이를 묵시하고 있는 이유도 알고 있다. 자주독립만이 동양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 그것은 일본국민과 대한제국국민 양쪽을 위한 것이다.
옥중에서의 안중근은 언제나 십자가에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어요. 이를 바라보는 치바 도시찌는 조국 일본과 이 사나이가 보여주고 있는 격정의 역사가 거칠게 부딪히며 자신의 마음 한 복판에서 일순간 정지되고 있음을 알았지요. 조국 일본이 한국을 주변열강으로부터 보호해 주기 위해 일련의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배워왔고 믿어왔죠. 한데 옥중에서 언제나 조용히 기도를 올리며 침착하게 신문에 응하고 있는 사나이가 보여주고 있는 동양역사의 흐름은 달랐죠. 이때 일본 본토의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은 일본정부의 판단임을 알리고 뤼순감옥으로 극비리에 전보를 보냈어요. ‘정부는 안중근의 범행이 지극히 중요함으로 징악의 정신에 입각하여 극형에 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한국병합을 꿈꾸는 일본정부는 세계의 이목이 뤼순감옥에 수감 중인 안중근에게 쏠리는 것이 점차 두려웠던 것이었죠. 치바 도시찌는 기도 중인 안중근을 바라보았어요.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는 그를 보는 순간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연민을 억누를 수가 없었어요. 기도를 다 마친 안중근은 뤼순감옥으로 이송된 후부터 조용하게 정리해 오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인 <안응칠 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했지요. 집필의 내용은 어느덧 치열한 항일투쟁을 결행하기 시작한 의병생활에 이르고 있었어요.
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에 또 한 번의 밀사를 파견했어요. 을사조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지요. 하나 파견된 특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은 국제회의에 참석한 일본과 대영제국의 방해에 부딪혔죠. 일본의 한국지배를 묵인하고 영국의 인도지배를 묵인하는 영일동맹에 의해서였죠. 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는 참석조차도 못했어요. 이렇듯 서구제국들의 방관 속에도 이위종이 호소한 대한제국의 비통한 실정은 결국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어요. 이 사건은 도리어 일본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어버렸어요. 일본은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자 고종의 양위식을 강행했어요. 초대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심히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안하무인격으로 이렇게 말했죠.
-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당당히 선전포고를 함 만 못 하다. 책임은 전적으로 고종이 스스로 져야 한다는 것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서 공공연히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에 협약 위반임을 면할 수 없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할 권리를 보완한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으로 하여금 통고케 하겠다.
이토 히로부미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토해내면서 미간에 잡힌 주름과는 다르게 마음속은 쾌재를 만난 듯 웃고 있었죠.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고종 양위식을 전달받은 총리대신 이완용은 한 술 더 떠서 말했어요.
- 헤이그 밀사 사건이야말로 정치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일본 정부나 이토 히로부미 통감도 격분하였는바, 이대로 둔다면 어떠한 중대사가 일어날지 모른다. 하여 폐하께서 사직의 안위를 염려한다면 차제에 자결함으로써 사직의 위기를 구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자신의 왕, 고종을 협박했어요. 송병준과 이병무도 이에 가세하였는데 특히 이병무는 칼까지 빼들고 대한제국의 황제이자 자신의 왕인 고종을 위협했어요. 일찍이 한 나라의 왕위에 올랐으나, 국운이 다해 바람 앞의 등잔불과 같은 종묘사직을 짊어진 채 일본의 탄압을 고독하게 버티던 고종은 마침내 자신의 대신들에 의해 왕위에서 내려오는 운명을 감수하게 되었죠. 이처럼 대한제국을 일본의 식민지화로 만들기 위한 또 하나의 작업인 제3차 한일협약, 즉 정미조약은 이토 히로부미가 이완용을 이용하여 너무도 손쉽게 이루어냈지요.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와 통감의 사저에서 조약을 체결했답니다. 이렇게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화가 되어가는 조약의 조인에 찬성한 매국내각 대신들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내부대신 임선준 이 일곱이었죠.
고종황제가 강압적으로 퇴위당하고 뒤이어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해산을 당했어요.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대한제국의 백성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하늘을 보며 통곡했답니다. 의분을 참지 못한 수많은 백성들이 마침내 이완용을 비롯한 여섯 매국노를 척결하고, 일본을 대한제국의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울부짖었답니다. 침묵할 수 없는 일부 백성들은 스스로 의병의 대열에 뛰어들었어요.
안중근은 일본에 대한 투쟁방법으로 단발적인 항전에만 머물렀던 생각을 버렸지요. 이제부터는 국가와 국가가 전면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임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음을 가슴속 깊이 새겼답니다. 이 지구상에서 어쩌면 영원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대한제국이 한국을 세계지도 위에서 지우개로 지우듯 없애버리려는 일본과 싸워야 하는 전쟁을요. 안중근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전쟁을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고 마음 깊이 새겼어요.
함경도 의병대를 찾아간 안중근은 점차 소수의 의병대를 이끄는 지도력을 발휘했지요. 러시아령 연해주에서는 의병조직에 참여하여 의병을 양성하는 한편, 1908년 이른 봄에는 김두성을 총독으로 대한국 의군을 창설하여 참모중장에 선임되고 바로 독립군 특파대장의 이름을 띠고 치열한 항일투쟁을 결행해 가기 시작했어요. 전쟁에 임한 안중근의 전술은 이러했지요.
- 소수의 병력으로 강력한 적을 치는 것은 어렵다. 한두 번의 전투로 승리를 장담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우리는 수십 번, 수백 번의 전투를 끊임없이 대비하고 십 년에 걸쳐 승리하지 못했다면 백 년에 걸쳐 승리하겠다는 생각을 하여야 한다. 또한 우리 대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면 아들 대, 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각오로 대 일본전쟁을 해야 한다.
안중근은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동요하는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마음으로 격려하고는 했어요.
-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큰일을 못 이루고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이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지어다. (男兒有志出洋外 事不入謀難處身 望順同胞警流血 莫作世間無義神).
안중근은 일본군과 삼십여 차례의 교전을 통해 일본군포로들을 생포했어요. 이때 잡은 포로들을 국제공법과 인도주의를 들어 석방해 주게 되었지요. 결국 이렇게 풀려난 포로들이 일본 수비대와 연합하여 기습공격을 퍼부어 안중근이 이끄는 부대에 커다란 피해를 입혔죠.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 뜻으로 포로들을 석방한 사실이 이유가 되었어요. 안중근은 한동안 의병대로부터 신임을 잃고 부대는 해산되는 뼈아픈 아픔을 겪었죠.
조국을 되찾겠다는 안중근의 의지는 강철같이 굳고 강인했죠. 자신의 실수로 인한 의병투쟁의 실패를 딛고 일어났지요. 1909년 초봄이었죠. 러시아 연해주의 연추강가 조그만 마을 크라스키노에 안중근을 비롯한 한국인 몇몇이 바람처럼 모였어요. 안중근과 뜻을 같이한 의병들이었어요. 의열투쟁에 앞서 조국독립을 반드시 이룩하기 위한 굳은 결심이 필요했어요. 태극기를 펼쳐놓고, 이들 모두 칼을 준비한 후 왼 무명지 관절 한 마디를 자르는 것이었죠. 모두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들어 태극기 위에 혈서를 썼어요. 말 그대로 피맺힌 글귀였죠. '大韓獨立'. 모인 열두 명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이룩한 일이 없으니 비웃음을 면할 길이 없소. 생각건대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단체가 없다면 무슨 일이든 목적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오.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하여 표적을 남긴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뭉쳐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오라고 하였더니 모두가 좋다고 따랐다. 이에 열두 사람은 제가끔 왼손 무명지를 끊고 그 피로써 태극기의 앞면에 네 글자를 크게 쓰기를 ‘대한독립’이라 하고는 다 쓴 다음에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불러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흩어졌다.
안중근은 후에 <안응칠 역사>에서 이렇게 기술하였어요.
이렇듯 동의단지(同義斷指)를 했으나 그 수가 적어 대한의군은 열세를 면치 못했어요. 안중근은 생각에 잠겼지요. 이대로라면 조국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 위기를 전 세계에 반드시 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