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에 대한 모든 신문을 마쳤다고 판단한 일본은 서둘렀지요. 조속히 공판을 결정했어요. 1910년 2월 7일이 첫 공판일이었답니다. 안중근은 깊은 심호흡을 했지요. 이 재판을 세계가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일본국의 신문에서 거듭 밝혔듯이 내 뜻이 왜곡됨이 없이 세상에 전달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내가 수감되어 홀로 ‘총성 없는 전쟁’을 하고 있는 이유다.
- 총알을 한발 남겼다. 이는 이토공을 살해하고 그 자리에서 자살을 계획한 것인가.
- 내 뜻에 의해 남겼다. 이토를 살해한 것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닌 전투에 참가하여 적장을 죽인 것이다. 승리한 군인이 자결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나의 목적은 나의 조국 대한제국의 독립과 그리고 동양의 평화다. 이러한 목적을 모두 달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 자살할 생각은 없었다. 다시 말하건대 나의 목적은 대한제국의 완전한 독립이며 동양평화의 실현이다.
일본은 안중근을 조사하는 동안 가능하면 빠른 시간 안에 이 사건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결론지었죠. 그래서 일본 본토에서 극비리에 도착한 전보를 그대로 실행해야만 했어요.
<안중근을 빠른 시일 내에 극형에 처하라. 이미 세계는 동양역사의 흐름을 단신으로 막아선 안중근에게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제2, 제3의 안중근이 나올 수 있으니 빠른 시일 내에 사건을 종결하라.>
일본정부는 이렇게 두려워하고 서둘렸죠.
뤼순감옥에는 일본 오카야마현 정심사 주지 마쓰다 가이준 스님이 교화사의 자격으로 안중근을 만나고 있었지요. 안중근을 찾아가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스님 가이준은 안중근의 인품과 그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답니다. 특히 그의 동양평화론은 수행자인 자신조차도 마땅히 함께 해야 할 불법의 대의처럼 여겨졌어요. 그와 불법의 인연인 시절인연(時節因緣)으로 도래한 바에 대해 부처님 전에 절을 올렸어요.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 사람은 교회사요 한 사람은 극형을 목전에 두고 있는 수감자일 뿐, 그의 사상은 국적을 뛰어넘는 부처님과 다름없는 설법 그대로였답니다.
- 스님, 같은 인종끼리 전쟁이란 폭력을 수단으로 해서 열강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야만적인 정책을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 패권을 장악하려는 침략정책을 일본은 멈추어야 합니다. 동양의 세계는 변해야 할 시기입니다. 그래야만 마땅히 동양의 세계는 올바른 공동의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바를 실현해야 합니다.
안중근은 심원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길로 한쪽벽면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지요.
- 무엇보다도 우선 동양의 중심지인 뤼순(旅順)을 영세중립지대로 정하고 대한제국, 중국, 일본의 협력을 위한 상설위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각국의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대한제국과 중국과 일본 3개국이 평화회의를 개최하고 일정한 재정을 출자하여 공동은행을 설립하여 공용화폐를 발행, 정치경제의 공동체를 만들어 경제 개발에 힘써야 합니다. 아울러 동북아시아의 공동 안보체제를 구축하는데 뜻을 같이하고 국제 평화군을 창설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로마 교황청도 이곳에 대표를 파견하여 3개국이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이러한 협의 안에 대해 국제적 승인과 영향력을 갖게 하자는 것입니다.
가이준 스님은 두 손으로 안중근의 손을 잡았어요. 그의 의연한 태도와 모습은 수행자인 자신에게도 따스한 모닥불 같았어요.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법열이 향불처럼 피어올랐어요. 스님은 기도를 드렸어요. 부처님, 대한의군 안중근과 제가 어찌 둘이겠습니까. 지금은 인연법에 따라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비록 저이가 먼저 떠나, 가는 곳 모르더라도 불법 닦으며 도솔천에서 다시 만나는 날 기다리겠습니다.
훗날 정심사에서는 안중근의 유묵 세 점이 발견되었어요. 그 유묵에는 옥중에서의 생활과 마음이 글씨 하나하나에 응축되어 있었지요. 어질지 않는 사람은 오랫동안 곤궁에 처하지 못한다(不仁者不可以久處約), 군자는 보이지 않는 바에 경계하고 삼간다(戒愼乎其所不睹), 분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敏而好學不恥下問). 이 유묵뿐만 아니라 여러 장의 기록사진도 있었지요. 그 안에는 사건에 관련된 사진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가이준 스님의 우정에 달리 감사할 방법이 없었던 안중근은 친히 쓴 유묵 세 점과 자신의 낡은 사진들을 모아 전했답니다. 뤼순감옥에서 맺어진 안타까운 두 사람의 우정이었지요.
일본정부의 공판진행은 눈에 띄게 빨라졌어요. 1910년 2월 10일, 첫 공판이 열린 날로부터 매일 한 번씩 공판이 열렸어요. 제4회 공판의 날이었죠. 검찰 측 논고 구형이 있었죠. 미조구치 다카오 검찰관이 입을 열었죠.
- 안중근의 범죄는 시대상황을 잘 못 인식한 지식의 결핍에서 왔다. 이것은 개인의 오해에서 나왔다. 배일기사와 그 논설에 오래도록 망종(亡種)한 결과 완강한 개인적 입장을 고수하다 한국의 은인인 이토공을 원수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실책은 복수심이 동기였다. 따라서 본 검찰관은 안중근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바이다.
1910년 2월 12일, 제5회 공판일에 변호 측 최후 변론의 시간이 잡혔죠.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 후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 운동이 일어났고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며 그동안 안중근을 위해 일신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최재형은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를 변호인으로 준비했으나 묵살되고 일제는 일본국의 관선 변호사를 선임했지요. 그들의 국선변호인 미즈노 기치타로도 검찰 측 논고와 똑같은 내용을 내놓았어요. 모든 것이 일본본토의 지시대로 움직여졌어요.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침묵하고 있던 피고인 안중근에게 최후의 진술시간이 왔지요. 안중근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어요. 그리고는 침착하면서도 단호한 기세로 말하기 시작했지요. 약 한 시간에 걸친 최후진술이었어요.
- 나는 검찰 측의 논고처럼 그리고 변호 측의 변론처럼 이토 히로부미가 주창한 정책을 잘못 인식하거나 오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정책은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조국,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저해하는 정책을 계속하여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민족을 이간질시켜 친일파를 만들었고, 내각의 대신들을 협박, 공갈하여 매국노로 만들었으며,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약소국을 강탈하는 침략전쟁을 일으켜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빼앗았습니다.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고 한반도를 발판으로 대륙침략을 강행하려는 온갖 계획을 진행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국의 계획된 침략야욕은.............마치 세계열강들끼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이러한 이토 히로부미를 나는 한국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살해한 것입니다. 이것은 대한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며 나는 이 순간 결국은 전쟁에서 패배한 포로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 나는 대한제국독립 이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안중근은 최후진술을 이렇게 마쳤지요. 그것이 마지막 외침이었어요. 물론 방청석은 텅 비어있었죠. 일본정부의 강제조치에 의해 피고측은 법정에서 내보내진 것이었어요.
1910년 2월 14일, 제6회 공판 날이었지요. 일본인 판사가 의사봉을 쥐고 세 번 내리쳤답니다.
- 판결, 피고인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
안중근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일본인 판사를 향해 말했답니다.
-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형 이상의 형은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