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공판에서 사형을 언도한 6회 공판까지 모든 것이 신속하게 처리되는데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죠. 미리 정해진 결말이었죠. 안중근을 감시, 경호하는 헌병 치바 도시찌는 양심의 가책과 안중근에 대한 경외감으로 온몸이 짓눌리고 있음을 알았지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안중근은 옥중에서 어떤 저술에 매달리고 있었답니다. <동양평화론>이었어요. 자신이 그동안 조국의 국권회복운동을 하면서 세워둔 지표로 독립운동의 기초적 배경이 된 사상체계를 기록하고자 한 저술이었어요. 가이준 스님과 나누기도 했던 동양의 평화에 관한 이야기들도 떠올리면서 하나씩 정리해 갔지요. 머지않아 이별을 고할 이 세계에 자신의 마지막 바라는 바를 이렇게 남기고자 했던 것이죠. 며칠 후에 조국의 어머니로부터 한통의 서신이 도착했어요.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뜨거운 음성이 담긴 편지였지요. 자식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였지만 항소를 포기하고 공분을 짊어진 사내로서 비겁한 삶을 구하지 말라는 고향땅 황해도의 여인, 그 어머니의 그 목소리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자식을 위한 사랑이 이슬이 되어 맺혀 있었어요.
헌병 치바 도시찌는 후일 이 편지를 자신의 일기장에 소중하게 끼워두었답니다. 어쩐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편지였던 것이죠. 자식과 어머니가 지상에서 나눌 수 있는 마지막 감동이 적혀 있었던 것이죠.
뤼순감옥의 형무소장인 구리하라 사다기찌는 수감된 안중근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 또 한 사람이었어요. 사형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지막 저술이 될 기록을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는 안중근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요. 그는 안중근이 어떻게 해서든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게 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남은 시간이 너무 적었지요.
- 당신을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해 주십시오.
- 그럼, 하얀 한복을 한 벌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수의로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은 아내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구리하라 사다기찌는 안중근으로부터 서신 한통을 받았답니다. 생의 절반을 조국을 위한 전쟁으로 살아온 사내가 처형을 앞두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였어요.
“분도 어머니에게. 우리들은 이슬처럼 덧없는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부부의 연을 맺고 다시 주님의 명에 따라 이제 헤어지게 되었지만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총으로 천국영복의 근원에 모일 것입니다.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세요. 어머님에게 효도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고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모든 일에 심신을 평안히 하여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랍니다. 많고 많은 말은 이제 후일 천국에서 기쁘고 즐겁게 재회하여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고 또 바랄 뿐입니다. 장부 도마 보냅니다.”
구리하라 사다기찌는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어요. 안중근의 뜻을 존중해 이 서신이 분실되지 않도록 우선 한국의 안중근 모친 앞으로 소식을 보냈지요.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내는 안중근의 마지막 편지가 아내 김아려에게 무사히 전달될 수 있도록 했어요.
“아마 이 편지가 어미가 쓰는 마지막 일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낸다.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천부(天父)의 아들이 돼 이 세상에 오거라.”
어머니의 편지와 함께 하얀 명주 한복 한 벌이 뤼순형무소로 도착했어요.
안중근에 대한 면회는 가족들조차도 일본정부의 철저한 통제속에 제한을 받았죠.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 안중근의 두 동생에게 면회가 허락되었어요. 형님을 철장너머로 마주한 동생들은 어쩔수없는 혈욱으로서의 눈물을 흘렸어요. 안중근은 눈물을 보이고 있는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을 나무랐지요. 그리고 마지막 유언을 전했어요.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라. 그리고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 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전해다오.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모아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워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옥중에서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집필에 쫓기고 있었어요. 하루빨리 집필을 마쳐야만 했지요. 허지만 끝내지 못했지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다해 집필했던 <동양평화론>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1910년 3월 26일 아침이 왔지요.
안중근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일어나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여전히 차분한 모습으로 말이죠. 기도를 마친 안중근은 그동안 자신을 감시하고 경호해 온 헌병 치바 도시찌와 지난밤 나누었던 이야기를 잠깐 떠올렸지요.
- 안중근 씨,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사과하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안중근은 미소를 보이며 이렇게 말했어요.
- 서로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마지막까지 자기 임무에 충성을 다합시다.
안중근은 잠시 정좌를 하고 앉았어요. 그리고 붓을 들었어요. 창살이 드리워진 쪽창을 통해 옥중 안으로 아침햇살이 들어오고 있었죠. 안중근은 천천히 붓을 움직였어요. 유묵 한 점이 써졌고 거기에 자신의 손바닥 인장을 찍었어요. 잠시 후 안중근은 그동안 입고 있던 옷을 벗고 고국의 어머니가 지어준 하얀 명주 한복을 갈아입었어요.
헌병 치바 도시찌는 옥중 문을 열었어요. 언제나 변함없이 차분하고 여유 있는 사람, 그가 하얀 한복을 입고 있음을 보았죠. 그는 자신과 형무소장인 구리하라 사다기찌에게 조용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답니다. 자신과 구리하라 사다기찌도 그에게 정중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어요. 대기하고 있던 헌병들이 그를 호위하고 옥중을 나갔지요. 치바 도시찌는 헌병들을 따라 형무소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요. 마음 저 밑바닥에서 안타까움이 소용돌이쳤어요. 치바 도시찌는 안중근이 나간 옥중 안을 들여다보다가 놀랐어요. 그곳에는 유묵 한 점이 놓여있었거든요.
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치바 도시찌는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쳤답니다. 복받쳐 오르는 눈물이 뒤섞인 목소리가 복도 끝까지 반향 하며 울려 퍼졌지요.
- 안중근 씨,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치바 도시찌는 생각했어요.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안중근은 일본헌병들의 엄호를 받으며 교수 형장으로 걸어갔답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나이 만 31세.
오전 열 시 사분 사형집행.
오전 열 시 십오 분. 絶命.
대한국인의 사랑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오 개월 후.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조약이 발효되었지요.
한일병합(韓日倂合)!
이 치욕스러운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条約)으로 그의 조국, 아니 우리 모두의 조국이었던 대한제국은 명멸하는 별빛처럼 사라져 가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젊은 동학군 장수 김창수, 아니 김구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에 몹시 애도하였다. 나라의 큰 장수를 잃은 슬픔을 훗날 반드시 조국광복으로 갚을 것을 맹세했다. 안중근 의사 가족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특히 의사의 동생 안공근은 참모로 휘하에 두어 조국독립을 위해 함께 일했다. 광복 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안장하기 위해 중국 장개석의 도움을 받아 유해를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조국에서 1949년 흉탄에 쓰러졌다.
헌병 치바 도시찌(千葉十七)는 안중근의 처형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의 명복을 빌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으로 괴로워했다. 그는 안중근에 대한 명복을 비는 것으로 남은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 죽는 날까지 합장(合掌)을 계속했다. 그가 묻힌 고향의 묘지에는 안중근의 유묵을 세긴 비석이 함께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