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아침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에서는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과 몽양 여운형이 마주 앉아 있었죠. 엔도 류사쿠는 전날 밤 경무국장 니시히로에게 여운형을 자신의 관저로 와달라는 요청을 보내도록 지시를 했죠. 여운형과 마주한 엔도 류사쿠는 작은 두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어요. 마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운형의 존재를 잊고 있는 듯했어요. 자신의 책상 모서리에 있는 자국에서 보내온 행정서류더미 위에서는 파리 한 마리가 앞발을 부지런히 비벼대면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준비 중이었지요. 말없이 눈을 감고 있던 엔도 류사쿠는 동그란 안경테 속의 작은 눈을 뒤덮고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는 말했어요.
-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됐던가는 지금 말하고 싶지 않다. 이제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해주기 바란다. 그렇게 민중을 지도해 주기 바란다.
듣고 있던 여운형의 눈은 미동도 없이 엔도 류사쿠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어요.
비밀 지하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결성하여 일제의 탄압에 끊임없이 저항하던 여운형이었지요. 류사쿠가 구사한 언어는 2차 대전의 패전국으로서 항복하니 조선을 침략하여 탄압했던 지난날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아니었어요. 침략국으로서의 사죄가 담기지 않은 오만방자함 그대로였지요.
그 순간 여운형의 눈에는 피에 젖은 태극기가 보였어요. 그동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동지들과 우리 동포들이 쓰러지면서도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지 않던 그 태극기가요.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지시키려던 카이로 회담이 있었지요. 이 회담에서 발표한 선언을 실행시키기 위해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는 네 명의 정상이 회담을 시작했어요.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칠, 중화민국의 장제스,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이 그들이었지요. 군국주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종용하는 이 회담에는 만약 일본이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일본은 자국의 완전한 파멸을 맞이할 것이라는 경고가 담겼죠.
1945년 8월 10일, 포츠담 선언을 일본은 수락했지요. 일본내부에서는 지도부의 분열로 항복을 번복하기도 했죠. 곧바로 다시 항복 번복 결정을 번복하여 마침내 항복을 하였어요.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8월 10일의 이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의사를 수락하였답니다. 마침내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한 한반도 통치가 막을 내렸어요.
국가를 외세로부터 지키지 못하고 농민구제에 무능한 구한말 정부였죠. 이를 향한 분노의 불길을 담은 동학농민운동이 1884년에 들불처럼 일어났어요. 이를 빌미 삼아 일본은 한반도를 거침없이 들어왔어요. 앞서 1875년은 조선영해 불법침입이 있었지요. 해안측량을 구실로 강화도 앞바다에 그들의 배가 들어온 것이죠. 이 조선영해 불법침입 때부터 일본의 한반도 침략야욕의 본성이 숨겨져 있었지요. 일본은 저들의 제국주의적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냈어요. 국모 명성황후를 일개 자객의 칼날에 쓰러지게 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고, 대한제국의 왕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 것을 거리낌 없이 자행했으며, 대한제국의 군대를 거칠 것 없이 강제해산했지요. 계획한 바대로 대한제국의 외교권마저 무참하게 박탈하고는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을 했어요. 대한제국을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 버렸죠. 이렇게 나라를 잃어버린 대한제국의 사람들, 우리 민족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1945년 8월 15일, 만 35년 동안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받아야만 했어요.
이 기간은 우리 민족에게 고난과 시련의 시기였답니다.
야만적인 일본제국주의의 잔악성과 포악함이 그대로 드러난 시기였지요. 약 사백여만 명의 우리 민족이 목숨을 잃었죠. 백육십 여만 명이 일본군에 강제징용 당했고, 삼십여만 명의 여인들은 위안부나 정신대로 끌려갔으며, 학도병을 포함하여 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이들은 사십 여만 명이 되었어요. 철도건설, 광산, 비행장 건설, 도로, 댐 공사장, 군수시설물 등과 관련한 징용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어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에 뛰어든 대한의군 및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의 무력 앞에 죽음을 당했어요. 자주독립을 위한 독립항쟁을 멈추지 않았던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이름도 남기지 않고 조국과 우리 민족의 품을 떠났어요. 많은 인명피해와 더불어 우리는 모든 것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죠. 우리의 모국어를 사용금지 당하고, 우리의 성씨를 개명당하면서 우리의 영혼이 으깨졌죠. 일본은 우리 민족의 분열을 획책했지요. 백오십 여만 명의 친일파들은 저들이 내민 손을 잡고 미련 없이 일신의 안일을 선택, 민족반역자가 되었죠. 자주독립을 꿈꾸었던 독립의 항쟁은 우리의 삼천리 산하에서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어요. 우리의 강토에서 우리 민족의 존재에 대한 희망과 꿈이 사라졌죠. 자주독립을 향한 민족의 꿈은 만주와 연해주와 시베리아로 이동했어요.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은 뜨거웠지만, 우리 조국의 자주독립은 요원했죠.
우리 민족은 삼십육 년 동안 일본에 의해 철저하게 말살되고 말았어요.
엔도 류사쿠는 자국의 지도부가 지시한 사항을 다시 한번 상기했어요.
- 나를 포함해 조선에 거류 중인 우리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란다.
미동이 없는 여운형의 눈은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조용했지요.
남산을 향해서 감시하듯 바라보고 있는 관저의 유리 창문을 통해 8월 15일 아침 해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어요. 엔도 류사쿠는 8월 10일 자국의 무조건 항복과 더불어 자신에게 떨어진 지시사항을 또다시 되새겼어요. 그러자 자신과 자신의 나라, 일본이 36년 동안 한반도에서 자행한 역사의 생생한 기록들을 생각하기가, 갑자기 싫어졌지요. 그의 입에서는 짜증이 뒤섞인 헛기침이 몇 번 튀어나와 얼굴표정과 얽히고 있었어요.
그때까지 조용하게 닫혀 있던 여운형의 무거운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지요.
- 일본에게 다음 사항을 요구하는 바이다. 하나, 모든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하나, 서울에 삼 개월의 식량을 확보해 줄 것. 하나, 치안 및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운동에 대해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하나, 학생과 청년을 조직해서 훈련을 하는데 대해 간섭하지 말 것. 하나,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사업에 동원하는 바에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이상이다.
일직이 기독교의 평등사상에 감화되어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시켰죠. 평등사상에 입각한 교육에 대한 계몽활동을 하던 중, 안창호 강연회에서 그의 연설을 듣고 마침내 조국의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어요. 길고 험난했던 독립운동에 일신을 다 받친 몽양 여운형다운 요구가 관철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