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ainmaker
Oct 13. 2024
단재 신채호는 일제에 의한 국권의 피탈이 확실해지자 1910년 망명길에 오를 때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 올리기를 거부하였어요. 이것으로 대한민국 국적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어요. 신채호는 1919년에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이때 이승만이 임정대통령에 당선되자,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고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며 과거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전력을 거침없이 성토하였어요. 신채호는 독립운동을 하며 우리 역사에 대한 집필도 멈추지 않았어요. 조선사를 비롯한 국사연구에 심혈을 기울였죠.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1936년 차가운 뤼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죠. 아들 수범은 광복 후 오히려 고통을 겪었죠. 아버지가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 정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신변의 위협을 받으며 넝마주이, 부도노동자로 떠돌았죠.
나라를 되찾은 지 63년이 지났어도 아버님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나라와 싸워야 한다.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쳤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이 땅에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치다. 라고 후손의 며느리는 말했답니다.
안중근의 사촌 동생 경근은 김구 항일특무조직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죠. 1948년 남북협상에서 그의 존재감은 김구가 북행길에 오를 수 있는 가교역할을 했지요. 1960년 4.19 혁명 후 민주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정치에 나섰으며 경상북도민족통일연맹위원장으로 통일운동을 주도하였지요. 5.16 쿠데타로 체포되어 군사정권하에서 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다 1963년 12월 석방되었어요. 조카 민생은 평화통일 운동에 가담했다 5.16 군사정권에 의해 징역살이를 했죠. 안중근 의사 혈족인 경근, 민생을 포함한 안잠 등 3인은 오십 년 만에 빨갱이 누명 무죄판결을 받게 되죠. 조카 진생도 외교안보연구원 본부 대사로 재직 중 1980년의 정권에게 강제 해직당한 뒤 8년간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죠.
조카 민생은 사촌 동생 경옥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과거 우리는 안중근의 집안이라는 이유로 왜놈에게 죽어야 했는데, 광복 뒤에는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의 피해는 여전하구나라고 한탄했어요.
차리석은 임시정부 국무위원 비서장을 지내다 광복 소식을 접하였으나 환국 직전 세상을 떠났죠. 그의 아들인 영조는 김구가 암살당하자 임정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가족은 숨어야만 했으며 심지어 성까지 바꾸어 살아야 했다고 했지요. 그 후 삶은 고달픔과 배고픔으로 점철되었죠. 학업은 사치였으며 동냥까지 하면서 살았던 그는 세인들이 꺼리고 싫어하는 모든 일을 다 하며 살았죠.
스물네 살의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 수뇌부에 폭탄을 던졌죠. 중국에서는 중국인도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했다며 존경의 인물로 찬사를 받았어요. 친손녀 주경은 뉴라이트전국연합에서 일부의 인사가 윤봉길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것과 매헌기념관이 있는 양재동시민공원의 명칭을 매헌공원으로 바꾸는 것을 당시 여당 내 국회의원이 반대하는 것에 당혹스러워했죠. 주경의 어머니는 독립유공자 가족이 못살면 조상 얼굴에 먹칠한다고 비난받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으면 독립운동했다면서 어디서 돈이 난 거냐라며 비아냥거리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했어요. 백범의 아들 김신의 도움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도 했어요. 주경은 말했어요. 자신은 축복받은 편이라고요. 왜냐하면 그래도 대학까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고. 독립운동가 유가족에게는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주는 것이 정부가 해줄 일이 된다면 좋겠다고, 그러면 스스로 자립할 힘이 생기지 않겠냐고 말했어요.
조선의열단 선전부장,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내무차장을 지낸 김성숙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다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죠. 어떤 날은 이렇게 일기장에 썼어요. 오늘 이백 원을 꾸어 쌀을 샀다. 내가 독립운동을 하고 정치를 한다고 돌아다니면서 가족을 굶기고 살고 있구나라고.
1919년 서울 4대문 사건의 주동자로 옥고를 치른 이원근의 손자 승봉, 조선 총독을 암살하고 일본 은행에 폭탄을 투척하려는 계획을 세우다 옥고를 치른 방한민의 손자 병건, 그들은 말하죠. 가끔 할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한다고요. 왜냐하면 둘 다 최근까지 건물경비로 일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국가보훈처 자료에 의하면 등록된 독립유공자 유족 가운데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많았어요. 직업이 없는 사람이 절반을 훨씬 넘고 고정수입이 있는 봉급생활자는 겨우 일할에 불과할 정도였죠. 중병을 앓고 있는 유가족들이 많았고 학력은 중졸이하가 절반을 넘을 정도였어요. 가난은 당연히 대물림되었죠. 독립유공자 유족을 보호해야 함이 당연한 국가기관으로부터 방치된 채 의료와 교육의 공백을 가져온 것이죠. 이 공백과 방치가 독립유공자 유족을 결국 다시 가난으로 내몰아 세운 것이죠. 독립운동을 한 집안은 3대가 망한다라는 말은 언제부터인가 우리 민족 사이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죠. 선대가 독립운동에 몸담은 자손은 선대 때의 가난과 피해의식을 그대로 어어 받아 사는 현실이 되었죠.
일제강점기부터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이를 세습까지 해온 친일 반민족주의자의 집안은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생겼어요. 해방과 더불어 북쪽처럼 친일 반민족주의자의 척결을 완결하지 못한 남쪽에서는 친일 반민족주의자에게 다시 기존의 권력을 주었고, 이로 인해 그들의 권력과 부의 세습이 가능하게 된 것이죠. 친일파 선친들에게서 물려받은 부와 권력으로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기득권을 손아귀에 움켜쥔 채 부유하게 잘살고 있는 현실이 남쪽의 현실이죠.
친일 및 반민족행위로 인한 기록이 남아있는 주요 인사에 대한 명단이 발표되었죠.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 반민족행위자 명단은 그 시기별로 다음과 같았죠. 제1기 1904년부터 1919년 3.1 운동까지 106인, 제2기 1919년 3.1 운동부터 1937년까지 195인, 1937년부터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활동했던 친일 반민족행위 705인, 총 1,006명이었죠. 이는 2009년 11월 27일 대한민국의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 반민족행위 관련자 중 주요 인사에 대하여 조사한 명단이었어요.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은 여러 분야에 중복 수록된 인물을 포함하여 각계분야의 친일 반민족행위를 자행하여 그 기록이 현존해 있는 주요 관련자 4,389명을 수록하였죠. 인물선정 작업은 일제강점기의 공문서, 신문, 잡지 등 3천여 종의 문헌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바탕으로 이백오십만 건의 인물정보에서 친일혐의자 모집단 이만 오천 건을 추출하는 과정을 엄정하게 거쳤죠.
작가 조정래는 일제강점기시절 민족반역자의 수를 약 백오십 여만 명으로 파악했죠.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 의해 친일파 반민족주의자 척결과 함께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 단행되는 기간에 북쪽에서 약 50여만 명의 민족반역자가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남쪽에는 약 100여만 명의 민족반역자가 있었지요.
일제 36년에 걸쳐 일제가 직접 살해한 우리 민족 수와 갖가지 수탈과 착취를 해서 굶어 죽게 한 이러한 간접살해 등으로 목숨을 잃은 수가 약 사백여만 명이었죠. 조정래는 그의 소설을 통해 이렇듯 기록하고 있어요.
일제와 손을 잡은 친일 반민족주의자 및 지주계층으로 구성된 이들이 일제치하에서 죽어간 우리 민족 수를 삼백만으로 줄여 잡아도 그들은 하나 앞에 두 사람씩 죽인 게 아니겠는가!
일제강점기에 대한 글을 쓰기 전 조정래는 책상머리 위에 붉은 글씨체로 적어 두었죠. 이렇게.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약 사백만 명의 우리 민족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이러한 민족의 아픔을 이만 장의 원고지에 새겨 넣겠다.
그는 약속을 이행했죠. 원고지 한 칸에 기록되는 글자 한 자 한 자가 일제의 야만적 역사 앞에서 유명을 달리한 분들임을 상기하며 축문을 써서 비문을 새기는 심정으로 말이죠.
이백 자 원고지 이만 장의 사백만 칸은 그렇게 해서 채워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