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받았답니다. 1986년과 1987년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눈물자국이 선연한 그의 소식을 담은 편지가 마침내 도착했답니다. 시드니에서 온 그 소식 몇 개는 정말 까마득하게 잊고 있으면 오는 비둘기 통신원 같았지요. 그것은 마치 기원전 삼천 년 경에 이집트에서 통신에 이용되었던 비둘기가 소식을 물고 온 느낌이었죠.
그가 알려준 부용산 오리길 녹색의 바다 숲 양쪽으로 코끝에 묻어오는 아카시아 향기마저 없었더라면 줄곧 먹먹했던 가슴이 아픔으로 아려졌을 겁니다.
- 광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벌교라는 소읍이 있다. 너도 언젠가 그곳을 가보렴. 그분의 시가 적힌 비를 보게 되겠지. 세상을 먼저 떠난 누이를 그리워한 사내, 이제 노인이 되어버린 그분은 언제나 고향땅에 돌아갈지 모르겠다. 다만 그곳에 있는 부용산시비가 그 시절 제망매가(祭亡妹歌) 임이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된다.
시인에 관한 이야기가 담담하게 담긴 그의 편지를 나는 낡은 노란 상자에 담았어요. 그 상자에는 그가 시드니로 떠나면서 보낸 첫 편지와 함께 그 이후로 보낸 두 통의 편지가 세월을 끌어안은 채 담겨 있었죠.
부용산 산허리에 /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사이로 / 회오리바람 타고 /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 너만 가고 말았구나 / 피어나지 못한 채 /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 부용산 산허리에 /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그리움 강이 되어 /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 재를 넘는 석양은 / 저만치 홀로 섰네 /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 너의 꿈은 간데없고 / 돌아서지 못한 채 /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 부용산 봉우리에 /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부용산. 박기동 )
순천사범학교에 부임하였지요. 1947년 남조선 교육자협회에 가입된 게 문제가 되어 순천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받았어요. 육 개월 정직처분을 받은 그해 누이가 병을 앓다 세상을 떠났죠. 꿈도 피지 못하고 세상을 먼저 등진 누이야, 나 여기 외로이 부용산에 서서 너를 그린다. 그렇게 시 ‘부용산’을 썼어요. 자신의 시가 노랫말이 되어 불러지기 시작했어요. 노래는 당시 빨치산이 즐겨 불렀죠. 작곡을 한 작곡가는 후에 월북을 선택했죠. 이것이 시인으로부터 자유를 앗아버렸죠. 불온한 노래가 된 것이죠. 시인은 수시로 불법연행과 가택수색을 받아야 하는 고초를 피할 수 없었어요. 감시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었던 시인은 조국을 등지기로 했어요. 시드니에 정착한 시인의 생활은 궁핍함 그 자체였어요. 호주정부로부터 제공받은 작은 임대주택과 얼마간의 연금으로 하루하루를 소멸시켜 갔어요. 시인에게는 꿈이 있었죠. 조국에서 써놓기만 하면 가택 수색하여 다 거두어 가버리고는 했던 시들, 그 시를 다시 써 개인의 시집을 내는 것이었죠. 또 하나는 자신을 버린 조국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꿈이었어요.
그가 시인을 만난 것은 시드니의 어느 한인회의 모임에서였어요. 시인으로부터 사연을 들은 그는 뼈마디가 잡히는 시인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답니다.
- 선생님, 반드시 조국에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그 조국에서 쓰고 싶은 시를 밤새워 쓰시고 시집은 조국의 서점에서 독자들을 기다리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시인은 이천 년 봄 꿈에 그리던 조국에 잠시 들릴 수 있었어요. 벌교 부용산에서 자신의 시, 부용산의 시비 제막식에 참석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사 년 후에는 돌아가겠다던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어요.
부용산 오리길은 녹색을 뒤집어쓴 채 바람 한 점 없는 적요에 젖어있었어요. 간간히 숲 속을 헤집고 들려오는 새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시인이 떠나간 길이 이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죠. 시비 앞에는 누군가가 시인의 누이를, 누이를 잊지 못했던 시인을 그리워했는지, 백합꽃다발이 놓여있었죠. 한순간 백합꽃잎이 눈이 시리도록 코끝을 울렸어요. 그때 녹색의 숲길 저 적요 넘어 시드니에 있는 그가, 비둘기로 하여금 자신의 소식을 물어 보낸 그가 아프도록 보고 싶어 졌죠.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한 달, 나는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라고 그의 1986년 2월, 그 겨울날의 편지는, 그렇게 고문당한 그 사람의 진술로 시작하고 있었죠. 시드니의 하이드파크, 참나무 아래에서 조국 하늘 아래에 있는 그 사람에 관한 소식을 읽으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는 내용이 함께 적힌 편지였죠.
1985년 12월 19일 서울형사지방법원 법정에서 진술이 있었어요. 그해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장이었던 그 사람은 고문 기술자들에게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어요. 조직적민주화운동을 통해 당시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에서였어요. 그해 9월 한 달은 조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을날의 햇빛을 만끽하게 하는 나날이었지만, 그 사람을 포함한 일부 사람들에게는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나날이었어요.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거의 매일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각 고문 당 다섯 시간 정도 계속되었습니다. 비명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 말을 못 하면 약을 강제 투입하여 목을 트이게 했습니다.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문으로 밥을 먹지도 못했습니다. 고문으로 가눌 수도 없는 몸에 집단폭행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나는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였습니다. 시멘트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그들이 이미 써놓은 조서 내용을 보고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편지를 읽고 난 나는 그날 밤 눈이 퉁퉁 붓도록 밤새 울었어요.
하숙집에서 한 대학생이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었죠. 그때까지 이 대학생으로 인해 1987년 6월, 뜨거운 불길이 된 국민의 분노가 그렇듯 거대해질 것이라고 수사관들은 몰랐죠. 연행되어 수배를 받고 있는 선배의 거처와 관련하여 취조당했어요. 이후 남영동 분실 509호에서 학생은 그의 짧은 생이 마감되었죠.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이었죠. 경찰은 이를 숨겼어요. 증거를 인멸하고 사건을 축소, 은폐하기에 급급했죠. 광주 민주화운동 시 특전대사령관으로 민중학살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면서 당시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이렇게 말했지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
조국의 6월 민주화운동은 호주 국영방송국에서도 관심을 가졌죠.
- 시드니 하이드파크 그 참나무 아래 앉아있다. 조국의 6월 민주화의 열기는 이곳까지 전해지고 있다. 조국에서의 집회는 비폭력과 질서를 외쳤다. 이렇듯 집회에 참석한 국민들은 일부 과격한 참가자들의 자숙을 당부했다. 아울러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정권에 전달하고 있다. 한데 나는 이곳 겨울날의 냉기 속에 갇혔다.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온몸이 축축이 젖어온다. 참나무가 바람결에 운다. 내 마음이 운다. 지금 나는 내가 어디에 앉아있는지 모르겠다. 쓸쓸하고 진눈깨비가 하이드파크 하늘 전체를 뒤덮고 있다. 어두워진다. 나는 고개를 두 무릎사이에 끼우고 웅크린 채 떨어지는 진눈깨비를 맞고 있다. 어둠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고 나는 발버둥 친다.
조국에서 전해온 한 대학생의 죽음은 스물일곱의 젊은 그를 힘겹게 했어요. 그 밤 내내 공원의 참나무아래 웅크리고 앉아 진눈깨비를 온몸으로 맞았다고 썼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