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그가 보내온 긴 소식 하나를 이제 생각하고 싶습니다. 시드니에서 만났던 시인이 2003년 마침내 조국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며 어린아이마냥 좋아했다는 내용이 함께 담긴 편지였어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해맑게 미소를 보이던 시인은 흥얼거렸답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작, 안성현 곡 )
이 보게나 젊은이. 이 노래를 그 친구가 부르고는 했어. 유달산 너머로 해가 지는 항구도시에서였어. 1948년이었지. 그때 그 항구도시에서 함께 교직에 있었거든. 어느 날 내가 썼던 시, 부용산을 읽더니만 그 자리에서 곡을 만들어주더구먼. 곡을 만들고 이렇게 말했다네. 기동이, 내 고향이 있는 남평, 마을 앞을 흐르는 지석강 백사장을 거닐면서, 시 엄마야 누나야에 곡을 만들었어. 곡을 만들면서 반드시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의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놓고 싶지가 않았어. 그리고 해방은 거짓말같이 찾아왔네. 우리 조국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 형제, 자매, 친구, 가족, 이웃들이 불러준 이 노래를 나는 많이 사랑하네. 자네의 시를 읽는 순간 통일신라시대의 피리를 곧잘 부는 그 승려가 생각났지. 세상을 먼저 떠난 누이를 그리워한 그는 슬픈 마음을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에 담았지. 그 마음은 천년보다 더 긴 세월을 건너 오늘도 전해지고 있네. 조국이 해방되었으나 일제치하처럼 어지럽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어. 목숨을 잃어버린 사람들, 따지고 보면 다 우리 형제고 자매며 우리와 너무도 가까운 혈육들이네.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해 슬프지 않을 사람 누가 있을까. 자네의 시가 나로 하여금 애를 끊게 하구만. 마치 내 누이 같아 그저 안타깝고 미안하이. 가까운 사람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지금도 잃어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시에 곡을 만들어 보는 거였네. 이 노래를 부르며 오늘의 참혹함을 이겨냈으면 해서네. 참말로 깊은 슬픔은 때로 사람을 혹독하도록 자유롭게 만들거든. 사람의 이성을 투명하게 해주기도 해. 이렇게 말했던 그가 그 후 월북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기 호주까지 오지 않았어도 됐지. 그는 내 시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어. 그러면서 길고도 긴 고통도 함께. 그 후로 나는 언제 어디서나, 그가 곧잘 부르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부르고는 하네. 왜냐면 이 노래에는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게 하는 마력이 있기 때문에 그래. 결국 이 늙은이도 조국에 돌아가지 않겠는가.
이렇게. 시인은 주름진 얼굴 가득 햇살로 퍼지는 웃음을 보여주었다고 그가 편지에 써 보냈어요.
시인은 대한민국 대통령직선제를 핵심으로 한 개정된 민주적인 헌법으로 성립된 제6공화국의 네 번째 정부 시절, 조국 땅을 밟았어요. 그리고는 다음 해 한 많은 삶을 안고 조국의 하늘 아래서 숨을 거두었어요.
네 번째 정부는 이전의 두 번째 정부보다 탄압은 가혹해졌다고 언론은 열린 포문을 닫지 않았죠. 노동운동계에서는 이를 거침없이 성토했어요. 일부 노동단체는 네 번째 정부에게 노동인권을 유린당했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구속노동자들은 수감상태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노동자 민중의 기본권 행사인 파업과 집회 등에 대해, 합법적 행사에 대해서는 보장, 불법적 행사에 대해서는 필벌을 내세워 천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구속되었죠. 노동운동계는 고위관료, 재벌총수 등 특권층의 국기문란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법이 있어도 처벌하지 않는 관용으로 일관한다고 성토했어요. 경제 정책은 기업투자의 위축으로 성장잠재력이 둔화됐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수출실적 역대 최고, 국민 일인당 국내 총생산 2만 달러 시대, 5년 동안 순 채권국이 되었죠. 대통령 자신부터 권위적 정치문화에서 내려오겠다며 이를 이행한 네 번째 정부는 전자정부를 구축하여 전자민주주의 분야에서 국내외 높은 평가를 받았어요. 더불어 네 번째 정부는 사회갈등의 여러 부분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었죠. 경제, 인사, 교육, 부동산 등 사회갈등문제가 도출되면서 국가경쟁력을 약화시켰죠. 한편으로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과 북의 문제를 남북의 인사들이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을 보여주기도 했죠. 전임 미 국방장관인 로버트 게이츠는 개인적 입장으로 당시 우리의 정부를 이르러 반미적이고 약간 미친 인물이 주도해가고 있는 정부라고 돌발적 평가를 보였죠. 국민들은 네 번째 정부의 공정성에 대해서는 여느 정부보다도 신뢰 있는 갈채를 보냈어요.
타국에서의 생활이 그렇듯이 누나의 야채출하관리유통망이 자리를 잡기까지 이십여 년이란 세월이 걸렸죠. 그도 다른 도시에 있는 몇 개의 유통분점을 관리하느라 드넓은 호주를 트럭으로 달렸어요. 세상의 바람결에 몰려 달리는 기분이었어요. 삼일씩 걸리는 거리를 왕복을 하고 들어와 하루를 쉬는 일주일의 패턴이 육 년째 되어가고 있었죠. 인조연골을 끼워 넣은 좌측다리는 세 번째 수술을 하고 나서야 정상에 가까워졌어요. 트럭을 몰고 며칠 씩 달릴 수 있는 몸은 바람결이 몰려다니는 세상을 통해 다시 만들어졌죠. 일요일이면 한두 달에 한 번씩 하이드파크를 온종일 걷고는 했어요. 그의 긴 편지 속에서 그렇게 걷고 있는 그가 금방이라도 조국으로 와닿아 줄 것만 같았어요.
- 누나의 사업을 돕는다는 이유로 호주 동부를 달리다 보니 21세기도 시작된 지 삼 년이 지났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노동조건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곳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부러울 뿐이다. 물론 이것이 호주 원주민, 그 토착민인 에버리지니의 탄압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영국계를 비롯한 다양한 민족이 함께하는 호주는 20세기의 첫날을 기하여 호주연방을 결성, 새로운 국가로 독립의 발을 내디뎠다. 아울러 사회경제의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호주사회에서 최하층을 구성하고 있는 원주민들에 대한 개화가 요구되었다. 부메랑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원주민으로 잘 알려진 에버리지니는 호주정부의 원주민개화정책에 희생이 되었다. 190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약 칠십 년 동안 토착민의 인권은 짓밟혔다. 호주정부와 교회에 의해 토착민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백인가정으로 입양된 것이다. 그 수가 십만 명이 넘었다. 현재 경제호황을 누리고 있는 존 하워드 연방 정부는 원주민개화정책에 대한 사과와 보상은 소극적이다. 이전 정권의 일이었다는 이유에서다. 호주사회일부에서는 과거정부 주도하에서 자행된 토착민의 가정 및 사회 파괴행위에 대해 과거사 청산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움직임은 대단히 강력하여 언젠가는 이 정책이 발효될 것이다. 역동적인 호주사회가 보여줄 변화가 자못 궁금해진다.
잠깐 화제를 돌려본다. 기원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산해경이라는 책을 통해 한반도의 꽃 하나를 기록하고 있다. 군자의 나라 한반도에 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구당서의 신라전에도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근화향이라 하였다며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왜기에도 기록한다. 조선의 대표적인 꽃은 고려시대에는 전 국민으로부터 열광적 사랑을 받았다. 구한말 선각자 윤치호는 애국가를 창작할 때 이 꽃이 들어가도록 발의했다. 민족주의자 안창호는 연단에서 서서 민족주의를 고취할 때 이 꽃을 빠지지 않고 절규하였다. 훈화초, 근화향, 조선의 대표적인 꽃, 무궁화다. 무궁화 꽃나무는 꽃피우는 것을 멈추지 않는 과목이다.
이 꽃이 피고 피는 삼천리 화려강산이 있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다. 예로부터 한반도 우리 민족은 무궁화를 사랑했다. 매년 여름과 가을동안 꽃을 피우는 무궁화나무는 특별히 환경이 좋은 곳이 아니더라도 잘 자란다. 생명을 키우는 뿌리가 어느 환경에서라도 생육을 잘한다. 뿌리의 힘이 강한 무궁화를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가까이했고 사랑을 주었다.
나는 이것에 몰입했다. 누나의 유통분점을 도와가는 틈틈이, 호주 동부를 쉼 없이 질주하는 틈틈이 무궁화를 생각했다. 시드니의 한인모임에서 만났던 시인, 자신을 버린 조국이지만 꼭 조국에 돌아가겠다던 그 시인과 함께. 이러한 내 개인적 몰입은 비바람이 부는 강을 건너기도 하고 벌판을 달리기도 하면서 어느 날에 이르렀다.
무궁화 뿌리와 시인은 별반 다를 바 없는 동일의 존재이구나. 결코 어려울 것 없는 이 결론을 맺기까지, 나는 너에게 몇 번인가 소식을 썼고, 그 시간은 정확히 이십 년이 걸렸다. 이십 년이 지나서야 나는 나 자신에게도 홀가분해질 수 있었다. 세상의 바람결에 몰려다니는 내 삶을 인정하고 비로소 자신에게 연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꽃 피우기를 멈추지 않는 꽃나무들. 한해를 지나오면서 약속이나 한 듯 꽃봉오리를 맺고 바람과 침묵을 만나 꽃잎을 떨어뜨리는 꽃나무들. 다년생 꽃나무들은 올해의 꽃봉오리를 내년에도 약속한다. 언제나.
무궁화꽃나무도 그랬다. 척박한 환경일지라도 뿌리만 내리면 반드시 꽃을 피우고야 마는 무궁화꽃나무. 무궁화나무를 떠올리면서 나는 울컥했다. 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고절한 아픔이 왔다.
강인한 이 생명력의 뿌리는 무엇인가. 곱고도 예쁜 꽃을 보여주는 무궁화꽃나무의 뿌리는 무엇인가. 바로 한반도의 민족, 우리들이 아닐까. 뿌리를 이루고 있는 우리 민족, 우리들이 이렇듯 매년 잊지 않고 꽃봉오리를 피어 올리는 것이 아닐까. 뿌리는 그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그 어떠한 물리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꽃을 피워 올렸다. 우리 민족은, 우리들은 그래왔다. 한반도를 화려강산으로 장식해 주었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꽃을 피울 수 있는 뿌리를 가지고 한반도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시인이 반드시 돌아가고자 한 땅. 나도 꼭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