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9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 중국인으로부터 영웅으로 추앙받는 한국의 한 남자의 기념관이 개관됐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다. 그곳에는 안중근 의사(義士)를 기리는 중국인의 마음이 담겼다. 소식을 접한 나는 울컥했다. 그들에게 감사하고 싶어졌다.
2014년 1월 8일, 나는 이곳 시드니에서 뒤늦게나마 한 편의 글을 마무리했다. 안중근 의사, 아니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將軍)에 대한 글이다.
중국 당 시대의 詩佛, 왕유는 종남산에 집 한 채 올리고 흰 구름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사는 꿈을 간직했다. 세상의 바람결에 몰려 살아오면서 나도 간간히 그와 같은 생각을 해왔던 것일까? 내 마음 저 한편에서 오래 묵혀졌던 참으로 잊지 않아야 할 어떤 한 사실은 그만 무심히 잊고 있었다.
흠모함이 부족했고, 기리는 바가 박복한 나는 내 마음 한편에서 기나긴 침묵으로 있던 그분을 아주 많이 잊고 있었나 보다. 귀밑머리에 흰머리가 자라 자연에 돌아가고자 한 왕유의 나이가 되고서야 그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분을 잊고 있던 만큼 낯부끄러움으로 얼룩진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한 시절 소년의 심정으로 내 가슴속 지문을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그 소년의 가슴이 새겨져 나온 것이다.
참회가 되어 나오는 그 잠 못 이루는 몇몇 날 밤이 아픔처럼 지나고 나서야 마지막 문장에 온점을 찍었다. 숙연한 마음으로 그 문장을 마쳤을 때 나를 바라보던 낡은 사진 속 안중근 장군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명멸해 가는 조국을 그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던 그분은 우리에게 오늘의 조국 대한민국을 남겨주었다. 내 마음 가득히 그렁그렁 눈물이 걸려왔다.
2014년 1월 20일부터 일본은 중국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의 과거를 미화할 수 없음에 괴로워하는 신음소리를 토해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과거를 만들고자 한다. 그래야만 내일의 일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본은 그들의 방식으로 역사를 반복하고 싶어 한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모든 역사에 남겨져야 할 것은 오직 우리 자신들의 기록뿐이다. 우리 자신들의 기록 이외의 모든 사실, 즉 진실은 한갓 풍화될 흔적일 뿐 존속되지 않는다. 라고 약소국가를 침탈한 경험 있는 일본은 오늘도 말한다. 이것은 여전히 변함없고 향후에도 그래야 한다고 말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그네와 우리는 지금도 역사의 진실을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전쟁 중이다.
이번 중국인이 대신해 준 역사의 진실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당연히 우리 모두가, 우리 정부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그렇다.
짧은 생의 절반을 조국을 위한 전쟁으로 살다 간 그분은 우리에게 여전히 의연하면서도 따뜻한 미소를 보여준다. 이 글은 그분의 미소에 대한 내 개인적인 존경의 답이다. - 시드니에서.
이 편지가 내게 도착한 것은 2014년 초봄이 올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박기동 시인의 귀국과 관련된 소식을 담은 편지 후, 정확히 십 년 만에 그가 보낸 소식이었어요. 네다섯 번인가, 시드니에서 보내온 남쪽 그 먼바다 너머 그의 편지들은 내 낡은 노란 상자 속에 담겼고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던 거예요. 저 먼 남쪽 끝 막막한 하염없는 바다를 건너오느라 그랬을까 싶었어요. 정말이지 십 년 만에 도착한 그의 편지였으니까요. 아마 이 편지는 2014년 1월에 썼던 것 같습니다.
그의 심경이 총총총 담백하게 묻어있는 편지였어요.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그가 소년의 가슴속 지문을 썼다는 그 글을 받아보게 되었지요.
원고지 백오십 장 분량의 그 가슴속 지문인 ‘안중근 대한의병 참모중장'에 관한 글은 내게 눈물을 만들어 주었어요. 대한의군 안중근 장군의 의연한 죽음이 오래도록 맥놀이가 되어 가슴 저 밑바닥을 울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