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ainmaker
Oct 21. 2024
그의 가슴속 지문이 담긴 '안중근 대한의병 참모중장'의 원고를 받고 난 얼마 후 나는 비로소 아득하게 잃어버리고 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답니다. 그와 함께 했던 밤하늘의 별과 같은 시간들이었죠.
아득한 계절의 끝, 그날은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수에 깃든 눈망울들이 겨울에 잠긴 도시의 거리를 가득 배회하는 시간이었죠. 그와 나는 광주 충장로의 우체국 앞, 우리 모두에게 우다방으로 불리는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어요. 그해는 기억하건대 그가 복학을 하였고, 이제는 민주화운동으로 불리는 광주의 5.18, 그 광주의 5월 항쟁이 세 번째 해를 지나가고 있는 때였어요. 우산도 쓰지 않는 그와 나 사이로 추적거리는 겨울비가 사선을 그으면서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죠. 그렇게 겨울비 속을 같이 걷던 그가 내게 말했어요.
- 안중근 의사가 왜 총알 한 발을 남겼는지 아니?
나는 대학 이 학년이 끝나가는 갓 스물한 살이었죠. 내가 다니고 있는 경제학과에 군에서 의병전역 후 복학한 그를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어떤 것들을 참 많이 알게 되었죠.
- 안중근 의사는 대한제국의 완전한 독립과 동양평화가 목적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 그분은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로 마음먹었어. 대한제국의 원흉을 쓰러뜨리는 것은 그분의 군인으로서의 본분이었어. 마침내 그 원흉을 쓰러뜨렸지. 불꽃 튀는 칠 연발 권총에 마지막 한 발이 남았다는 것을 떠올렸어. 이 마지막 한 발은 남긴다. 내 목적하는 바가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이여 반드시 독립하여 국권을 회복하라. 내 죽어 천국에 가서라도 필히 대한제국 만세를 외치리라.
그는 칠십사 년 전 대한의군 안중근 장군이 적장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그 자리에 서서 꼬레아 우라! 를 외치듯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번쩍 올려 보이기까지 해 보였어요. 사선의 겨울 빗줄기 속에서 그의 달뜬 음성이 입김이 되어 퍼져 올랐어요. 잠깐 동안 그의 겨울비에 젖은 얼굴에서 미소가 느껴졌죠. 나는 그가 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고 있었죠. 그의 젊음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조국이었으니까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내려졌죠. 5월 18일 새벽 2시 전날까지 충정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포함한 계엄군이 신군부의 명령에 의해 광주에 들어왔어요. 신군부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정치인과 재야인사들 수천 명을 감금하고 국회를 봉쇄, 정치활동 금지령, 휴교령, 언론보도검열 등의 조치를 내린 후였어요. 1980년 5월 18일 오후 네 시 무렵이었죠.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과 시위에 가담하지 않는 무고한 시민들까지 계엄군 제7 공수여단 의해 살상, 폭행당했죠. 이를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어요. 중장년층은 물론 청소년들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가담하게 됐죠. 5.18 민주 항쟁은 그렇게 해서 번졌죠. 5월 27일까지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 항쟁 결과 5월 단체 발표 사망자 606명이었죠. 사망자는 항쟁 당시 숨진 165명을 비롯, 부상 후유증 사망자 376명, 행방불명 65명이 포함되었어요. 부상자는 3,100여 명이 넘게 발생했어요. 3,000여 명에 달하는 시민이 연행되어 고문을 당했죠. 김대중과 관련하여 그와 더불어 내란음모를 꿈꾸었다는 각본 속에서 말이죠. 이 각본의 지휘에는 전두환을 포함한 정호용, 주영복, 이희성, 황영시 등이 있었죠. 그들은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가차 없는 유혈진압 및 고문을 지시했던 것이죠. 국내 언론은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 민주 항쟁 진압을 승인했다는 보도를 했어요.
그해 그는 군에 입대했어요. 5.18 아침 휴교령이 떨어진 학교 정문 앞에는 대학생들이 모여들었죠. 전국비상계엄령 확대라는 소식 앞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오월의 아침 하늘을 가로지른 것은 그때였어요. 전두환은 물러가라. 미국은 각성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오후 네 시가 되었을 때 상황이 급변하였죠.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이 시작되었고, 대학생들이 쓰러졌어요. 계엄군들의 진압의 강도는 더욱 거세졌고, 일반시민까지 합세한 시위대는 이미 이성을 상실해 버린 계엄군의 진압 앞에 무수히 쓰러져 갔지요. 지옥과 같은 광주에서 공포에 떨며 버티지 못한 일부 젊은이들은 산과 바닷가 쪽으로 피신하였어요. 그들은 계엄군의 총과 단검과 진압봉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선배와 친구들과 시민들을 구출하지 못하고, 결국은 함께 하지도 못하고 불가항력의 절벽에 몰렸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쓰러진 선배와 친구들, 그 많은 일반 시민들에 대해 죄스러움을 가슴 가득히 끌어안고 그 절벽으로부터 달아났어요. 공포로부터 달아나 인생에서 가장 쓴 괴로움 속으로. 피와 눈물로 젖은 오월의 도시를 뒤로한 채, 한 순간 지옥으로 변해버린 자신들의 도시로부터 탈출하여 산속으로 바다 쪽으로.
살아남은 자의 회한을 가지고 입대를 했지요. 살아남은 자의 비겁함을 가지고 군 생활을 했어요. 광주에서 도망친 비겁자로, 어떤 때는 폭도지만 용케도 군입대하여 자유대한민국의 병영이나 염탐하는 쪼잔한 염탐자로, 낙인찍힌 가혹한 세월이었죠. 그 세월 동안 모멸감을 뼈에 새기도록 만드는 선임병들의 군기용 구타가 있었죠. 힘에 부치는 나날의 연속이었죠. 화강암 봉우리 다섯 개가 섬처럼 보이는 오봉산을 바라보며 유격훈련을 받을 때였어요. 피폐된 몸과 마음으로 견뎌온 나날은 유격훈련장의 장애물을 모두 통과하기는 무리였어요. 유격훈련을 버텨내지 못한 몸뚱이는 결국 의병전역을 하게 만들었죠. 군의관의 의무조사 심의 결과가 기록되었어요. 과도한 훈련으로 인한 좌측다리 연골 회복불능 손상 및 디스크판정.
봄 자락 틈에서 이제 막 자목련이 처연한 보랏빛 몸을 비틀며 피어나고 있었죠. 그것은 만신창이가 되어 그가 캠퍼스에 돌아왔을 때 모습과 흡사했지요. 그해 봄 그가 복학했고, 나는 이학년이 되었고, 그 자목련 꽃그늘 아래서 나는 뚝뚝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는 자목련을 목도했고, 그가 거기 주저앉자 떨어져내리는 꽃잎을 맞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날이 흐르고 풀뿌리가 눕는다 ( 풀. 김수영 )
그의 가슴에서 울려 나왔던 많은 것들을 나는 들었고, 그의 언어에서 정제된 많은 것들이 진실 있게 기록되어 있는 책들을 보았어요. 그 진실들은 지나간 각종 언론과 자료에서 확인했고, 나도 그처럼 내 일기장에 그 별빛 같은 숨결들을 적어가기 시작했어요. 그와 내가 치열하게 찾아내고자 한 진실이 기록되었죠. 헬 수 없는 밤을 지새우다 보랏빛으로 밝아오는 새벽길을 걸어 나올 때까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었어요. 그 시절이 투영된 이야기들은 내 손끝이 만지고 있는 오늘 이 시간과 씨줄날줄로 엮이며 현실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내 스물한 살, 그와 나 사이에서 사선으로 떨어지는 그 겨울비 속에서, 스물세 살인 그가, 그 젊음이, 참으로 조국, 우리 대한민국을 격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존재하는 이유였지요. 아니 그보다는 내가, 그와 내가, 내 친구들이, 그 시절을 살아가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존재하는 이유였어요.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겨울비가 내리던 그해 겨울이 지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죠. 치유되었으리라 그렇게 어리석게 생각하고 있었던 그의 만신창이 몸은 치유가 되지 않았죠. 아니 치유가 될 수 없었어요. 그해의 자목련이 처연한 보랏빛 몸을 비틀며 피어났을 때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타국으로 떠난다고 했어요.
- 누나가 호주에 있다. 아무래도 몸이 견뎌낼 수 없을 것 같다. 부서져버렸어. 몸이야 이대로 데리고 다니면 되는데 조국을 떠나 있으려니 많이 힘드네. 그곳에서 새 생활을 만들도록 할게. 그래, 반드시 이 조국에 돌아올 거다. 약속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