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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Oct 12. 2024

그리고 유가족

   - 분도형이 죽었죠. 아주 어릴 때였어요. 낯선 아저씨가 형에게 과자를 주었어요. 형이 그 과자를 먹고 난 뒤에 시름시름 앓았어요.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 형을 보지 못했죠. 분도형을 신부로 키워달라고 아버지가 어머니께 유언을 남겼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형은 여덟 살이 되지 못하고 아버지 곁으로 갔어요. 


   안준생은 바이올린 연주를 마쳤어요. 음식점 주인은 얼굴이 야위고 창백한 이 청년이 안중근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불편했죠. 자신의 음식점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조르는 청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야기를 했죠. 그것은 고용주가 어찌할 수 없이 고용할 수밖에 없는 하소연이었어요. 허지만 일본 경찰의 감시가 걱정이었죠. 일본 경찰은 대부분 상점에 안중근 가족의 고용을 철저하게 단속했어요. 이를 어겨 발각될 경우 고용주는 일본의 탄압을 받게 되었죠. 이틀이 지난 뒤 안준생은 음식점에서 쫓겨났죠. 가는 곳마다 자신이 안중근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다음 날부터 그곳을 갈 수가 없었어요. 상해 일대를 떠돌던 어린 시절부터 일본의 탄압과 감시는 끊임없이 계속되었죠. 가족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러시아와 중국 각지를 항상 떠돌아다녀야 했어요. 누나 안현생과 어머니와 함께 힘겨운 삶을 살았죠. 삶은 피폐했고 항상 헐벗고 굶주렸죠. 안준생은 장성해서도 직장을 구할 수 없어 거지처럼 힘겨운 삶을 살았죠. 일제의 탄압과 감시 속에서 안중근의 유가족은 그 누구도 돌볼 수 없이 방치되었죠. 


   안준생은 일본 경찰에 의해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와 이토 히로쿠니 앞에 끌려갔지요. 그곳에 숨겨진 음모를 모르는 체 말이죠. 이토 히로쿠니는 아버지 이토 히로부미를 숨지게 한 안중근의 죄를 아들인 안준생이 사죄해 줄 것을 요구했어요.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인 그는 이토 히로부미로 인해 얻게 되었던 기득권이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과 더불어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몹시도 분개해 왔던 터였죠. 미나미 지로는 안중근의 죄를 아들이 사죄해 준다면 안전한 생활은 물론 자신이 기꺼이 양아버지가 되어주겠노라고 말했죠. 사죄와 함께 변절의 요구가 계속되었죠. 만약에 이를 거절할 경우에는 가족들은 더 처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며 언젠가는 소문도 없이 피살될 것이라고 협박이 이어지고는 했지요. 


   며칠 동안 계속 이어진 회유와 협박이었어요. 여기에는 일본정부의 치밀한 각본과 계획이 숨어 있었죠. 아시아 전역에 식민지 확장과 더불어 조선의 내선일체에 혈안이 되어있는 일본은 이 목적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어떤 것이든 여기에 이용할 계획을 하고 있었죠. 이토 히로부미를 사망하게 하여 자신들의 제국주의를 세계 각지에 알려 그 부당함을 드러나게 한 안중근이었어요. 이러한 안중근의 행위가 일개 개인의 잘못된 인식으로 인한 테러였다 라는 발표는 일본이 바라던 바의 각본이었죠. 더군다나 이러한 발표를 안중근의 아들을 통해 사죄로 발표된다는 것은 일본정부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먹잇감이었던 것이죠. 


   1939년 10월 아버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절명시킨 지 꼭 삼십 년이 된 가을날이었죠.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경성의 남산에 지은 절이 있었어요. 그의 이름을 딴 박문사(博文寺)였죠. 안준생은 박문사를 찾아가 분향을 했어요. 그 자리에서 이토 히로쿠니에게 사죄를 했답니다. 아버지의 잘못을 사죄합니다. 안준생은 눈물을 흘렸어요. 아버지의 이름을 부끄럽게 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회한의 눈물인지, 가족이 그동안 고통스럽게 살아왔던 것은 아버지 때문이라는 격정의 눈물인지, 일본의 회유와 협박에 마침내 스스로 무너지면서 결정한 변절에 대한 고통의 눈물인지, 이토 히로쿠니에게 아버지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죄하는 반성의 눈물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눈물이었어요. 


   당시 경성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어요. 조선통치의 위해한 전환사, 부처의 은혜로 맺은 내선일체, 망부의 속죄는 보국의 정성으로, 이등공(이토 히로부미) 영전에 고개 숙이다, 운명의 아들 준생군. 언론은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덧붙였어요. 이토의 또 다른 양아들 이토 분기치를 만나 이토 히로쿠니에게 했던 사죄를 했지요. 이 둘의 만남은 매일신보에 기재되고 극적인 대면, 여형약제(형 같고 동생 같고) 라는 제목 아래의 기사에 사진과 함께 실렸어요. 


   안준생은 일본 내에서도 이와 같은 공개사과를 계속했어요.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은 아주 흡족해하면서 안준생을 양아들로 받아들였어요. 안준생에게는 특별히 영국인 세관장이 살던 고급주택을 선물하기까지 했지요.


   김구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안준생을 변절자, 민족반역자로 규정하고, 그를 죽이려는 계획까지 세웠어요. 김구는 한때 황해도 일대에서 동학에 가담하여 봉기를 일으켰을 때 안중근의 집안에 기거하며 목숨을 부지했던 인연이 있었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절명시켰을 때는 안중근의 의거를 누구보다 높이 산 김구였죠. 김구는 가슴이 찢어진 듯 아팠죠. 안중근의 가족을 잘 지키지 못한 아픔 때문이었죠. 우리 민족 스스로가 안준생이 변절의 길을 가도록 방치해 버렸다는 자책감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죠. 


   1945년 장제스와의 회담에서 김구는 안준생에 대한 처분을 부탁했죠. 안중근 자식이 일본에 항복하여 상하이에서 여러 가지 불법행위를 하고, 아편을 매매까지 하였다. 이는 실로 유감이다. 중극 측에 부탁하는 바니, 명령을 내려 안준생을 구금해 주기 바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길에 오른 김구는 중국 관리에게 이렇게 말했죠.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극형인 교수형에 반드시 처해주기 바란다. 김구가 부탁한 이 두 가지는 실현되지 않았어요. 


   조국이 해방이 되었으나 안준생은 귀국할 수 없었죠. 1950년이 되어서야 조국에 몰래 숨어서 들어왔어요. 그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하여 1952년 그의 길지 않은 생애를 피난지 부산에서 마쳤어요. 


   안중근의 장녀 안현생은 여덟 살이 되어 아버지를 잃었어요. 그 해 가족들과 함께 망명하지 못한 안현생은 서울 명동의 수녀원에서 지내다가 1914년 13세 때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족들을 만났어요. 19세 때 일제의 눈을 피해 프랑스 치외법권지인 조계지가 있는 상하이로 다시 옮겨간 뒤 이곳에서 불문학을 공부했지요. 해방이 된 이듬해 두 딸과 조국에 돌아왔어요. 서울생활을 시작했으나 세상물정에 어두운 그녀를 사람들은 그대로 두질 않았죠. 안중근 의사의 가족임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갖가지 사기도 당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죠. 6.25 전쟁 당시에는 대구의 효성여자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전쟁 이후 서울에서 궁핍하게 생활하다가 1959년 숨을 거두었어요. 


   안중근 유가족의 비극적인 삶은 우리 민족이 그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방치한 결과였죠. 안중근의 거사 이후 그 누구도 그들을 일제의 행위로부터 보호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유가족의 고통스러운 삶은 그대로 유가족의 몫이었을 뿐이었죠. 유가족의 비극은 그대로 유가족의 비극이었던 것이죠. 우리 민족 모두가 안준생이 변절의 길을 가도록 했으며, 안현생이 안중근을 이용한 사람들에 의한 피해 속에서 괴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방관한 것이었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신의 안위를 초개처럼 버리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수많은 지사들과 그 가족들도 우리 모두는 지켜주지 못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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