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지금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가
'시'-놉시스: 시의 설계도
당연한 말이지만 무슨 글이든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략된다면, 그 글은 반드시 난파된다. 이 ‘무엇’이란 항해로 따지면 나침반이다. 작품 내에 존재하는 모든 문장의 주어이며, 작가의 감각과 사유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명확한 지침이다. 항해사는 이 나침반에 의존하여 루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배를 조타하며, 혹시나 발생할지 모르는 온갖 조난에 대비한다. 만일 나침반이 없다면 배는 망망대해를 표류할 공산이 크며, 그 자리에서 단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통상 ‘구상’이라고 말한다. 이스마일 카다레도 글쓰기에 관해서 (1)언사 없이 구상하는 단계 (2)언어를 입히는 단계 (3)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단계 등 세 층위가 있다고 말한다.4) 요컨대, 글쓰기는 구상과 창작, 발표로 이뤄진 시스템이라는 것. ‘시’의 문장을 입히기 전에 창작자는 반드시 이 ‘무엇’에 대해 고민해야 하며, 이 고민을 글로 스케치한 것을 나는 ‘시-놉시스’라고 이름 붙이겠다.5)
시-놉시스는 두 가지 방향을 갖는다. 하나는 스냅사진처럼 대상의 단면을 잘라 순간적인 ‘이미지’를 스케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을 둘러싼 ‘사건’의 윤곽을 잡는 것이다. 후자가 대상의 시간성을 담아낸다면 전자는 공간성을 담아낸다.
이를 통해 작품의 의도나 줄거리를 설정하고, 각각의 시퀀스에 맞도록 인물과 사건 등을 세분화한다면, 적어도 글쓰기는 산만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 도무지 줄거리조차 파악하기 힘들 만큼 난삽한 작품을 읽을 때가 있다. 문법을 무시한 채 기본적인 ‘통사(統辭)’을 갖추지 못한 문장은 물론이고, 사건은 엉킨 실타래처럼 도무지 풀리지 않거나 갑작스럽게 해소되기도 한다. 작가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용어를 갖다 붙였지만, 필자가 보기에 정말이지 눈물겨웠다.
시-놉시스는 길면 안 된다. 한 문장으로 압축해도 되며, 열 문장 정도까지 풀어내면 된다. 다시 말해 대상과 의도만 확실하면 된다. 필자의 졸작을 예로 든다면,
[#1 이미지 스케치] 서촌에서 바라본 저녁. 그 붉은 구름의 찌꺼기. 8월의 미지근한 바람. 내 몸의 유일한 바닥을 디디며 환기미술관까지 걷다가 푸른색 몽환 속으로. 그 한없는 죽음 속으로. 쓸쓸해서 오래 머물러야 할.
[#2 사건의 윤곽 잡기] 시청이 있다. 사람들이 서류가방을 들고 마호가니의 육중한 문을 들락거린다. 경비원 두 명이 버티고 서서 무료한 눈으로 사람들을 쫓는다. 나는 어디쯤에서 두 사람에게 표시될까. 안전함. 테러의 징후 없음. 스페인풍의 시계탑에서 괘종이 울린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잔디에 모여 광장의 전시물에 집중한다.
후에 [#1]은 「저녁이 머물다」로, [#2]는 「시청이 있다」의 기본 코드가 된다. 이 이미지를 골격으로 하여 시는 작품으로 고양된다. 이미 눈치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시는 이미지-들의 활동사진이며, 이 ‘판타스마고리아’(환등상, phantasmagoria)6)가 상영하는 그림자놀이다. 다시 말해, 시에서 이미지는 절대적으로 ‘움직인다.’ 반드시 기억하자.
한 가지 더. 한 개인의 정서를 요약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서는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매개되지 않는다. 반드시 그 대상과 연결된다. 아무리 내면에서 치솟는 근원적 불안이라도, ‘죽음을 향하는 존재’라는 이정표는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 정서는 아주 사소한 사건(혹은 일탈)과 함께 온다.
*
글은 반드시 자체 내에 ‘나침반’을 내장하고 있어야 한다. 내가 쓴 글이 일정한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을 때, 하나의 지도를 완성했다는 성취감과 행복감을 동시에 맛볼 수 있으려면 이 ‘무엇을 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특히, 시와 같은 촌철의 언어는 이에 대한 시-놉시스가 없을 경우, 아무리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이 배치되어도 금방 눅눅해지고 밋밋해진다. 게다가 시인조차 자기가 쓴 시가 무엇을 형상하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독자들은 아예 실마리조차 잡기 어려워진다.
시는 문장의 나열이 아니다. 시는 ‘대상’에 대한 시인의 성찰을 담은 문장의 시적인 배치다. 만일 ‘그것’─무엇을 쓸 것인가?─이 명확하다면 문채로서의 기술적인 문장 쓰기도 가능해진다. 요컨대, 작품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7) 의도적인 생략이나 한 없이 늘이기의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말이다. 혹은 주어나 동사 등의 문장 성분을 일탈시켜 애매하게 만드는 것도.
하지만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시발점일 따름이다. 작품 산출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작품의 질과 양 모두를 미리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선행 지표다. 때문에 이 고민은 단번에 끝내야 한다. 길게 끌 필요가 전혀 없다. 시-놉시스는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수정된다. 계속 언급하지만, 우리는 이미 숙성된 경험을 갖고 있다. 그 경험에서 내 마음이 집중하는 것을 끄집어내면 된다. 삽화와 같은 유년의 기억,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보던 황혼, 시청에서 시립미술관까지의 산책…… 그 어느 것 하나 버리기에는 아까운 경험의 각인들이다.
내 경험 하나 얘기할까 싶다. 2015년 6월에 경추 확장 수술을 하고(무슨 이유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손끝과 발끝부터 안쪽으로 서서히 마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 3~4개월 정도 아물기를 기다렸다가 주구장창 걸어다녔다. 전신 마취하느라 줄어든 근력을 보간해야 하는 탓이고, 경추를 열었으니 뛰어다니기가 좀 버거웠기 때문이다. 직장이 광화문 근처였다는 것도 한몫했다. 시청까지 도보로 약 20분, 시청을 기점으로 덕수궁으로 방향을 틀어서 시립미술관까지는 10분, 구세군회관을 지나 서촌까지 30분, 서촌에서 맥주 한잔하고, 단골이었던 <밥 딜런>에서 음악을 듣다 보면 하루가 지났다. 가끔, 하늘을 뒤덮은 붉은 구름이, 붉은 바람과 함께 내게로 쏟아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바닥을 딛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땅에 붙박여 벗어나지 못한 채 생(生)의 종말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 서글퍼졌다. 아마도 병원을 자주 들락거릴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일지도.
바람이 불었네
미세먼지가 씻겨 간 오후
외투에 툭, 떨어진 햇살 한줌 물컹했네
잠시 병(病)을 내려놓고 걸어 다녔네
시청과 시립미술관이 까닭 없이 멀었네
정동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해 기우는 서촌에서 부스럼 같은 구름을 보았네
물고기는 허공이 집이라 바닥이 닿지 않는데
나는 바닥 말고는 기댈 곳 없었네
가파르게 바람이 불어왔네
내 몸으로 기우는 저녁이 쓸쓸했네
쓸쓸해서 오래 머물렀네
— 박성현, 「저녁이 머물다」 전문
이 시의 ‘그것’은 ‘걷다’라는 동사다. 산책을 하면서 느끼는 온갖 감정들을 모조리 쏟아내지 않고, 그 가운데 당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쓸쓸함’이라는 단어를 뽑아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문장을 썼다. 참고로 나는 시 쓰는 속도와 시간에 편차가 심한 편이다. 등단작은 한 번인가 퇴고를 거쳤을 뿐이고 이 시도 골격은 바로 나왔다. 어떤 시들은 몇 개월이나 혹은 일년이 넘도록 미완성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
확실히 ‘무엇’에 대한 고민은, 시 쓰기의 확고부동한 출발점이다. 시-놉시스의 필요성도 거기서 나온다. 다만, 지나치게 몰입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충분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그 경험은 오랜 세월 마음의 상자 속에서 숙성되었을 것이며 언제든지 우리를 사로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중요하지만, 그것에서 바로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
4) 이스마일 카다레, 양영란 옮김, 『사고』, 문학동네, 2012, 59~60쪽 참고.
5) 시-놉시스는 시의 개요, 줄거리로 내가 만든 조어(造語)다. 영화에서 쓰는 용어(시놉시스, synopsis))와 한글 ‘시’의 합성어. 공교롭게도 앞 글자의 발음이 같다.
6) 우리는 가끔 ‘세계는 마법의 환등기가 펼치는 꿈일지 모른다’는 플라톤적 환상에 빠질 때가 있다. 가령, 그림자놀이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빛과 빛이 닿는 사물은 숨겨진 채 그림자만 남는다. 판타스마고리아는 이 환등의 놀라운 마법을 지칭하는 벤야민적 사유의 집합체다.
7) 통상 우리는 이 ‘필요성’에 대해 시인이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작품이 결정하는 것이다. 내적 논리에 따라 작품이 허락해야만 우리는 ‘그것’을 쓸 수 있다. 물론 시인이 문장을 옮겨 쓰는 것은 맞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