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박성현
외투를 집어 들자 살얼음이 떨어진다
우울은 커피잔 속에 넣을 만큼 충분히 가볍다
대답은 절박하고 질문은 간단하다
계획서는 의도적으로 묵살된다
찢어졌으므로 그 무엇도 확인할 수 없다
의자에서 쫓겨난 사람은 넥타이를 풀지 못하고
복도 끝 재판관은 결과에 만족한다
─ 칸마다 붉은 선이 그어져 있군요
─ 모자이크가 감춘 건조한 목록도 있네요
─ 무성영화처럼 소리를 잃어버린 분쇄기는 없나요
도무지 종적을 알 수 없는 도둑처럼
게시판에 걸린 몽타주는 수많은 얼굴이 집약된 것
우리 중 누가 지목되어도 그만이다
몇 명은 제시된 수수께끼에 골몰했지만
해답은 치밀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유보된다
인쇄되기도 전에 신문은 유효기간이 지나버린다
막다른 골목에 버려진 낡은 가구처럼
알리바이 없는 우리는
문득 자신이 늙어버렸음을 알아버린 서류철
연극이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는 채 앉아 있는 연출가
길이는 다르지만 같은 트랙을 질주하는 비명
모든 것을 지켜보는 창문,
창문의 명랑한 예감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문예중앙, 2018. 수록
[以後, 시작노트] 눈이 없는 사람들이, 입 없는 사람을 쳐다본다. 소리를 못 듣는 사람은 공장의 모퉁이에 쌓인 철가루를 향해 걸어간다. 입만 있는 사람은 말을 멈추고 웃기 시작한다. 너, 냄새가 지독해. 두 귀가 멀쩡한 사람은 안테나를 돌리면서 주파수를 맞춘다. 소리가 들릴 때까지 안테나는 돌아간다. 철가루를 한움큼 움켜쥐고 입에 욱여넣는다. 새파란 창문에 물방울이 떨어지고, 냄새를 맡지 못하는 사람이 그 모양을 손가락으로 그린다. 만일 눈만 있는 사람이 이 방에 있다면, 두 개의 입이 열리고 동시에 말을 한다. 그들은 쓸쓸한 척하는 사람과 정말로 웃는 사람이다. 구석에서 실컫 울다가 리모컨을 켠다. 그는 유통기한이 다 된 사람이다. 휘발류를 뿌렸고 라이터를 켜기 직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