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황무지

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by 박성현


불의 황무지




고원 너머 만년설보다 더 먼 곳에 태고(太古)1)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는데 서쪽 언덕 높은 곳에 뿌리내린 상수리나무에는

항상 아이들의 목이 매달려 있었다

백 년을 넘긴 전쟁으로 아버지들은 미쳐갔고 매일 굶주린 아이들을 목이 부러지도록 매질했다

아이가 고꾸라지자 이번에는 목을 잘라 나무에 매달았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목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시계추처럼 흔들렸고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 때면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아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후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아버지도 있었는데, 그때 그는 신을 산 채로 씹어먹는 황홀한 꿈을 꾸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정신 차린 아버지들은 울면서 자신의 정강이뼈를 도려냈다

목에 뼈를 아무리 붙여도 아이들은 살아나지 않았다

그러나 숲에서 따온 산딸기가 맛있게 익을 때 사냥한 짐승들의 털가죽이 부드러워질 때 아버지들은 다시 매질을 시작했다


지금 상수리나무에 걸린 것은

아이들의 가냘픈 목이 아니라 흙으로 빚은 인형

나는 서랍을 열고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힌 두 번째 그림엽서를 꺼냈다; 가지마다 귀여운 목이 걸려있네


*


처음에는 정체 모를 짐승의 울음이었으나 밤이 깊을수록 늑대의 묵직한 울음으로 변했다 시베리아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횡단하면서 늑대들이 짓밟은 아버지가 아니면 더 나쁜 것2)


매일매일 찾아오는 아침의 무리 햇빛을 받으며 햇빛 속에서 죽어야 하는 랑(浪)의 성호


아버지 혹은 더 나쁜 것


*


2021년 2월 24일 자 조간신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바람조차 닿으면 바스러질 것 같은 짙은 갈색의 옥수숫대 사이로 ‘랑’은 도자기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고 누군가 소년을 갈기갈기 찢어 태워버렸다


다음 날, 기자는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한다;

몇 시간 전 랑은 자기 고주망태가 된 아버지에게 “잡놈아 꺼져”라고 소리 질렀다가 땟자국이 잔뜩 껴 있는 보드카 병으로 머리를 맞았다 랑은 밤이 되길 기다려 도망쳤다 옥수수밭에서 목이 잘리고 시커멓게 타버린 시체가 발견된 것은 며칠 뒤였다


술 취한 아버지들이

아이들을 때리다가 목을 부러뜨렸어

재투성이 아이들은 꾀를 내어

인형을 훔쳐 와서 나뭇가지마다 매달았지


나는, 먼지가 켜켜이 쌓인 기록물 보관소에 앉아 있다 랑이 죽은 그날의 날씨와 온도, 사건을 찾아내고 랑의 죽음과 관계된 인물들을 정리했다 사건의 시퀀스는 단순하다 랑의 시체는 목이 잘리고 불에 탔다 그 사실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빛 하나 들지 않는 납함에 갇혀버린 기분이었다


물 흐르는 쪽은 어디일까

갑자기 나는,

자그마한 노랫소리를 듣는다;


가지마다 귀여운 목이 걸려있네

가지마다 귀여운 목이 걸려있네


목이 말랐다

웅덩이에 고인 물이라도 들이킬 정도였다 그때 예기치 않은 인물이 필름을 뚫고 튀어나왔다 기자는 덤덤하게 적고 있다;

랑이 죽은 자리에서 몇 발자국 더 가면 험멜hummel3)이라는 이름의 허수아비가 싸리나무로 엮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멀리서 까마귀 깃털을 쓴 야기yagii 할머니─그녀는 글자를 배운 적이 없지만 누구보다 이야기를 잘 만들어냈다─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는 할머니 바느질로 손가락이 붙어버린 것이 무척 끔찍하고 부끄러웠다


*


바다는

옥수수밭이 멈추고 모래사장에 수직으로 내리꽂힌

암벽 너머에 있다

험멜과 랑은 수평선 너머

해 지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은 조용히 모래를 걷고 파도는 발자국을 삼키며 장소를 지켰다 멀리서 아버지 혹은 더 나쁜 것

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라앉는 해는 수면의 파문을 녹이고 굵은 해파리들 속으로 촘촘하게 파고들었다

톡, 틱탁, 톡 톡, 탁


나는,

매일매일 그들이 본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모세의 불타오르는 숲 혹은 그림자 없는 사물들의 기괴한 목소리 나는 나다4), 라는 3만 년 동안 타올랐던 신의 무한한 목소리—험멜과 랑은 넋을 잃을 채 바라보았지만 신이 왜 그곳에서 타오르는지

신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톡, 틱탁, 톡 톡, 탁


불의 황무지는 타오르고

떨기나무에 매달린 신의 목은 흔들린다

결여와 과잉에 도달한 듯

결여와 과잉만이 신의 이름이라는 듯

술 취한 아버지들이 잘라낸

아이들의 목

*


지금 우리의 온도는 수직 하강하고 있습니다

3만 광년이나 떨어진 두 개의 작은 점이 –273.15℃에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부피가 0인 뼈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으므로 다시 뼈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심장을 떠난 말은 언젠가는 수신처를 찾아가겠죠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쩌면 집요한 무관심이 당신의 동맥에 침투할 때까지


*


험멜은 랑의 인형을 자주 봤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저녁이 시작되고 옥수수밭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라> 음이 울려 퍼졌어요 그 소리가 우울하게 들려올 때면 랑은 어김없이 시를 썼죠 마치 관악기 같은 차갑고 부드러운 휘파람을 들으면서 왕국의 유물처럼 빛나는 죽음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요 랑의 인형은 그런 신비스러운 힘이 깃들어 있었죠


술 취한 아버지들이

아이들을 때리다가 목을 부러뜨렸어

재투성이 아이들은 꾀를 내어

인형을 훔쳐 와서 나뭇가지마다 매달았지


가지마다 귀여운 목이 걸려있네

가지마다 귀여운 목이 걸려있네


험멜은 랑의 입술에 스며든 ‘라’ 음의 숨겨진 비밀이 있는데 인형에서 늑대 울음이 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피가 고여 있었다, 고 기자는 수첩에 따로 적는다

늑대의 발자국에 스민 고독과 울분처럼 언젠간 한꺼번에 터져 나와야 하는


그러나 랑의 육체에서 빠져나온 것은

늙고 병들어 모든 것을 용서받은 아버지,


혹은

아버지보다 더 나쁜


*


죽기 전 랑의 고백;


난 미라로 변하고 있어, 육체의 먼 곳부터 시멘트처럼 굳어지는,

그리고 밤마다 신들이 찾아와 폐와 심장과 하복부를 도려내고는 항아리에 숨겨 놓는 거야, 대신 놈들은 뱃속에 모래를 잔뜩 뿌려놓지,

나는 눈멀고

귀먹은 자,

입술마저 닫힌 벙어리,

모든 사물이 유령의 문장으로 돌변하는 그 소용돌이에서,

내 시퍼렇던 나뭇가지들이 썩어버리는 거야,

매일매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꿈을 꾸는데, 가끔 그 악몽에서 깨어나기 싫을 때가 있어,

현실이 더 지옥이거든,

현실이 더 지옥이거든,

현실이 더 지옥이거든,


*


현실이 더 지옥이었어요 아무것도 먹지 못하겠어요 자꾸 토하기만 해요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있으면, 이상한 소리가 스멀스멀 기어나와 고막을 찢어요 날카로운 쇠붙이로 창문을 갉아대는 이 소리는 오랜 장마에 산비탈이 붕괴되는 소리였어요 바다에 떠밀려간 아버지는 여태 돌아오지 않아요 아직까지 물에 젖은 편지 한 통도 없는 걸요 물귀신처럼 시커먼 해초를 뒤집어쓰고 뭍으로 올라와서는 슈퍼마켓에서 깡소주를 마시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고 내 눈앞에서 거대한 파도가 그를 덮쳤다면, 손쉽게 잠을 잘 수 있을 텐데…… 뭐, 그게 사실인지 알 수 없으니 아버지가 돌아오길 기다려야겠죠 혹시 물귀신을 보면 보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어머니! 더는 못 먹겠다니까요 제발 더러운 음식은 치워주세요!


*


어둠이 모든 사물을 감쌌다

검은 테두리가 점점 커지더니 토성의 불길한 고리만큼이나 두꺼워졌다 천지간에 흩어진 모래들을 집어삼키면서 나는,

흰 천장을 바라보았다

옥수수밭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불의 황무지

랑과 험멜과 야기의 목이 매달려 있는 적막한 천국의 어디쯤에서

나는,




1) 올가 토카르추크 소설, 『태고의 시간들』의 배경 마을의 배경 마을

2) 라캉의 문장

3) 독일에서 생산되는 귀여운 인형

4) 야훼의 말